[엄상익의 촌철] 북한 ‘핵’보다 무서운 남한의 ‘중2’

“나는 손녀가 세상을 보는 눈과 인생을 아는 마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그분께 기도한다.”

어느새 손녀가 커서 북한의 ‘핵’보다 더 무섭다는 남한의 ‘중2’가 됐다. 그런데 손녀는 내가 볼 때마다 축 늘어진 지친 표정이다. 학교에 가고 학원엘 가고 밤에 집에서 또 공부해야 하고… 삶이 힘겨운 것 같다.

“국어 몇점 받았니?”
“백점이요”
“영어는 몇점이니?”
“백점이요”
“수학은?”
“말하지 않을래요”

손녀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흔든다. 백점이 아니면 할아버지한테 말하기 싫은 것 같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내게 말한다. “손녀 프라이버시를 묻지 말아요. 그러다가 손녀 얼굴을 못 보는 수가 있어.”

좋은 대학이 인생의 목적이고 현실적으로 일등급이 타켓인 것 같다. 나도 그랬다. 희망하던 대학이 불가능해졌을 때 절망했었다.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던 그 시절 세상은 일방적으로 나를 세뇌시켰다. 그리고 대부분이 시대조류에 검불같이 흘러갔다. 손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다.

나는 손녀가 뭐를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 생각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갑자기 청록색 안개가 낀 기억 저편에서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은 한 미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음악학원에서 공업고등학교 3학년인 그 소년을 만났었다. 그는 내게 악보를 따주기도 했고, 나는 연주기법이 적혀 있는 영어로 된 음악 서적을 그에게 번역해 주기도 했다.

어느날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공고에 다니는 나는 공부쪽이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음악쪽으로 가려고 학원에 다니고 있어. 아무래도 전기쪽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아서. 그렇지만 너는 명문중학교를 다니는 걸 보니까 공부 선수 같아. 너는 네 길을 가고 나는 내 길을 가는 게 맞을 것 같아. 너무 음악쪽으로 빠져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게 어떨까?”

따뜻한 마음이 흘러나오는 그를 나는 “형”이라고 불렀다. 그 몇 년후 나는 그가 최고의 기타연주자인 신중현씨와 함께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걸 봤다. 그리고 자신이 뭘 잘하고 어디를 갈지 빨리 안 그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하얀나비를 부른 고 김정호씨와 오니언스 임창제씨(왼쪽)

내가 대학시절 히트를 쳤던 ‘편지’라는 노래를 부른 오니언스의 가수와 ‘하얀나비’를 작곡하고 노래 부른 김정호씨가 미아리의 한 개인 노래학원에서 만나서 나누었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의 처음 대화는 “너 공부 못하지?”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음악으로 세상을 한번 뒤흔들어 보자고 약속했었다는 것이다. 정상의 위치에 오른 가수 전인권씨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친척 형이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게 너무 좋아 보였어요.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하루 종일 기타치고 노래만 하고 살았어요. 평생을 음악 이외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어요.”

일찍 자신이 좋아하는 걸 알고 평생 그 길을 걸어온 그는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가왕이라고 불리는 조용필의 일생도 그렇고 70대 중반인 지금까지 매일 기타연습을 거르지 않는 송창식의 경우도 그렇다.

그들이 세월의 흐름에 휩쓸리고 남들의 눈과 세상의 가치관에 얽매여 있었다면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꼭 이름이 나고 인기를 얻어야만 성공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가로등이 비치는 조용한 밤거리에서 낡은 청바지를 입은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칠이 벗겨지고 세월을 알려주는 손때가 묻어있다. 그는 낮에는 전자제품점에서 진공청소기를 수리하고 있다. 그는 일하는 시간 외에는 손에서 기타를 내려놓는 적이 거의 없다. 한 밤중의 길거리는 그가 작곡한 노래를 발표하는 무대였다. 나는 그 모습도 괜찮은 것 같았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내남없이 시대의 조류에 떠밀려 검불같이 흘러온 건 아닐까. 성적이 조금만 좋으면 한번 자신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법대나 의대에 갔다. 그게 아니면 개성에 상관없이 대기업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보다는 성공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빨리 높게 올라가야 하는 인생이었는지도 모른다.

간혹 그런 걸 벗어나는 삶도 보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친하던 같은 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스스로 하루에 몇 시간씩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밥을 굶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공부도 잘했다. 그는 부모의 요구로 의대를 들어간 후 그룹사운드를 조직해서 연주생활을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그가 음악에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금세 프로가 됐다. 국내 최고 인기 록그룹 ‘사랑과 평화’의 핵심이 되어 공연을 했다.

그후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도 클럽에서 연주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의대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처음부터 음악에 전념했으면 수많은 좋은 곡들이 생겨 났을 것이다.

늙어서도 타고난 끼를 어쩌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치과의사인 한 친구는 의원의 문을 닫고 전국을 방랑하고 있다. 텐트를 차에 싣고 산과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기타를 치며 자기가 작사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유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정서가 맞지않는 아내와 이혼을 하면서 모든 재산을 주었다. 그는 산속 컨테이너에 자연인으로 새로운 삶터를 마련했다.

지난 가을 고성의 캄캄한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혼자 기타를 들고 앉아 있는 그를 보러 갔었다.

손녀는 늙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멀고먼 세월 저쪽에서 무서운 ‘중2’를 겪어 봤다. 나는 손녀가 세상을 보는 눈과 인생을 아는 마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그분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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