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진실은 단순하고 투명해야

임을 위한 행진곡

사법고시 3차시험의 면접관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문제를 낼까 밤에 고민하다가 ‘진실’을 주제로 삼았다. 변호사 생활 40년 가까이했지만 진실이란 단어는 하나지만 각자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로 변하기도 했다. 나는 면접 시험장에서 예비법조인들에게 이런 케이스 문제를 제시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얻어맞았다고 가정합시다. 목격자도 CCTV도 없습니다. 멍이 들거나 하는 외형적인 상처의 흔적도 없습니다. 당신은 폭행을 당한 건가요? 아닌가요? 그런 경우 어떤 행동을 할 건가요?”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면서 당황하기도 했다.

“폭행이 아닙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맞았다는 게 진실입니다. 그렇지만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러워도 참고 말아야지.”

얼마 전 원로시인 고은과 성추행 문제로 법정소송을 벌였던 여성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진실을 정의했다. 그녀는 증명된 만큼만 진실이더라고 했다.

성추행이 증명되지 않으면 고발된 진실은 허위가 되는 것일까. 증거가 부족하면 꽃뱀으로 몰리는 수도 있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봤다.

원로 법관과 진실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진실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했다. 일반인들이 진실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판사가 선고하는 진실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특히 그가 젊은 시절 한 판결 하나를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랬다. 지방도시의 총각 의사가 다방여종업원과 사랑을 나누다가 아이가 생겨났다. 그 후 의사는 서울로 와서 다른 여성과 정식결혼을 했다. 세월이 지나고 그 아이가 자라났다. 아이는 그 의사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유전자검사가 있었다. 과학은 99.9999퍼센트 그 의사의 아들임을 인정했다. 판사는 유전자검사는 그렇게 나왔을지 몰라도 법은 아들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과학은 아들이라고 하고 판사는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 판사는 내게 진실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그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 내가 만나 본 그 아버지는 종이같이 메마른 정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정액 한 방울을 뿌렸다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그 원로 법관의 말에 아직도 동의할 수 없다. 과학을 뭉갤 정도의 판결은 진실이 왜곡될 어떤 배경이 있다고 의심한다.

또 다른 사건이 있다. 부도에 몰린 기업회장이 자신이 뇌물을 준 정치인 몇 명의 이름을 유서에 써놓고 목을 매달고 죽었다. 내막은 모르지만 한 맺힌 죽음이었다. 나는 그와 낚시도 하고 한 두 번 만난 인연이었다. 죽음을 걸고 쓴 유서 그 자체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확실한 증언이 뒤따랐다. 회장의 심부름으로 뇌물을 전달한 그 기업의 임원이 법정에서 진실을 얘기했다. 그러나 법은 대상이 된 정치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우연히 증언을 했던 그 기업의 임원을 만났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직접 돈을 가져다줬어요. 그러니까 나 자신이 증뢰범입니다. 내가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진실을 얘기했는데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 회장님이 자살을 하면서 쓴 유서 내용도 거짓이라는 거죠. 법적인 진실은 그런 건가 봐요”

시간이 흘렀다. 유서 속에 등장하던 한 정치인이 방송 인터뷰에서 하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내가 조사를 받으러 검찰청에 가니까 기자들이 천명쯤은 온 것 같았어. 내가 죽는 순간을 보러 온 거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지. 결국 내 결백이 증명됐잖아요.”

죽은자의 주장과 산자의 말중 어떤 게 진실일까. 죽은 사자는 살아있는 개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내가 본 법정은 악마가 신나게 한판 놀면서 진실을 왜곡하기도 했었다. 모략과 거짓말이 난무하고 돈은 진실 같은 허위들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었다.

진실은 단순하고 투명해야 한다. 상식이 통하고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증거 법칙이나 법리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의 사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치나 혁명의 다른 색안경이 진실 앞에 씌워지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담백하게 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납득되지 않는 판결들을 떠올리며 장래 판사님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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