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권력형 검사’와 ‘인권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36년전 조영래·신기남·이원영 변호사를 추억하다

1987년 2월 5일 아침 10시경이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으면서 서소문 거리는 질척거렸다. 도로변에는 먼지 섞인 눈 덩어리들이 천덕구러기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어둡고 우중충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변호사들의 사무실이 들어있는 빌딩이었다. 입구에 붙은 아크릴 안내판에 입주해 있는 변호사들 이름이 붙어 있었다. 4층에 박원순 변호사가 있었다. 3층에는 고교선배인 신기남, 이원영 변호사 이름이 보였다. 전부 고교 선후배이고 사법고시나 연수원 동기들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의 신기남 변호사사무실로 들어갔다. 당시는 개업한지 얼마안되는 30대의 청년 변호사였지만 후에 박원순은 서울시장으로 대통령후보가 됐다. 신기남 변호사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여당의 당대표가 됐다. 연수원동기이기도 한 이원영 변호사는 노동계의 국회의원이 됐다. 나는 40년 세월 저쪽의 그 시절로 돌아가 젊은 시절의 나와 그 시대를 보고 있다.

그 1년 전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던 가을이었다. 사법연수생들이 따로 성남 부근의 부대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다. 먼지가 풀풀 이는 연병장의 한 구석에서 고교 선배인 신기남과 함께 총을 어깨에 걸치고 나란히 앉아 쉬고 있을 때 그가 이런말을 했다.

“사법연수원을 뒤늦게 들어가니까 말이야. 판검사 출신들이 교수를 하는데 한심해서 못 봐주겠어. 자기들의 틀 안에 꽉 갇혀 살아오면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들이 최고의 성공을 한 것으로 착각하는 거야. 철학도 없고 사회의식도 없고 국가관도 없어. 인생이 어차피 한번인데 검은색 법복보다는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로 삶을 채색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신기남 선배는 다른 눈이 열려있는 것 같았다. 고지식한 나의 영혼에 이상하게 깊은 울림을 준 한마디였다.

그 무렵 나의 가슴을 두드린 또 다른 사건 하나가 있었다.

그 시절 사법연수생들은 검찰청에 가서 검사직무대리의 역할을 했다. 의사로 치면 레지던트 비슷했다. 배당받은 사건을 수사하고 기소하는 일을 했다. 그때 조영래 변호사가 동부검찰청 301호 검사실 검사직무대리인 내게 한 사건의 피의자를 변론하기 위해 찾아왔다.

고교선배인 조영래 변호사는 후배 사이에서는 전설이었다. 고교시절 그는 그 어려운 영어문장들을 완벽하게 해석해 100점을 받았다. 그는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들어간 천재였다. 출세가 보장된 일생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 투쟁의 지도자였다. 수배를 당해 피해다니면서도 청계천시장의 노동자인 전태일이 분신을 하자 그 평전을 써서 우리들의 피를 들끓게 했다.

조영래는 오랜 세월 도망자생활을 하다가 그 얼마 전 뒤늦게 변호사사무실을 차렸다. 그를 따르는 박원순 변호사를 데리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처리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문제를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그를 따르는 후배변호사들 중에는 천정배 등 새끼호랑이들이 득실거리는 것 같았다.

조영래 변호사는 검찰청 앞 화단으로 불러내 화단 턱에 앉으라고 하더니 옆에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도 뒤늦게 검사직무대리를 몇달 해봤지. 매일 아침이면 빨간딱지가 붙은 수사기록과 포승에 묶인 피의자들이 앞으로 오지. 그들의 수갑과 포승을 풀어주고 담배 한개피나 종이컵에 담긴 자판기 커피 한잔 주는 검사가 몇이나 될까? 먼저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선배는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 뭔가를 깨달은 사람 같았다. 반면 사법연수원에서 교수를 한다는 검사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현직 검사인 어떤 교수는 자기의 기소장 한장으로 재벌그룹이 날라갔다고 공개적으로 자랑했다. 그 오만이 좋게 보이지를 않았다. 검사 출신 교수들 중에는 이렇게 검찰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검찰은 속칭 ‘곤조’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검사가 되면 나이 30년 위까지는 맞먹어도 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됩니다. 수사할 때 나이를 의식하면 안 되니까요. 밖에서 누가 인사를 해도 공손하게 받으면 안됩니다. 검사를 잘 아는 척하고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권력조직 안에서 살아온 기능적인 사람과, 광야에서 뛰는 인권변호사 조영래가 세상을 보는 차원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지금 변호사회관 앞에는 조영래 변호사 동상이 있다. 변호사회관에 붙어 있는 표어는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 또래들은 조영래 변호사가 살아있었으면 노무현이 아니라 아마 그가 대통령을 했을 거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어쨌든 두 선배의 영향으로 그날 나는 신기남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신기남 선배는 사법고시 동기였다. 같은 해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는 홍준표도, 추미애도 있었던 것 같다.

신기남 변호사의 사무실은 소박하다 못해 약간은 궁상스러운 기운마저 보였다. 나무 책상 위에서 여직원이 타이프를 치는 모습이 보이고 그 옆 탁자에 조간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추도식 전면 봉쇄’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남 변호사의 초라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작은 사무실을 빌려 다른 두 변호사와 함께 쓰고 있었다.

“일자리나 사무실을 구해야겠는데 잠시 신세 좀 집시다.”
“이원영 변호사가 쓰던 방이 있는데 그걸 쓰시오.”

그가 흔쾌히 승락해 주었다.

“이원영 변호사는 왜 방을 비웠죠?”
“도서관에 다니면서 더 책을 읽고 내공을 쌓겠다고 잠시 변호사 일을 그만뒀어. 변호사를 하는 것보다 대림동쪽 공단 노동자가 많은 곳에 사무실을 내고 노동운동을 하고 싶다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무렵 우연히 그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서울법대생이던 그는 고시보다 농촌운동을 하는 써클에 가입해 시골에 가서 일을 하다가 왔다고 했다. 그 인상이 남아 있었다. 그는 고시는 조금 늦게 합격했다. 나와는 사법연수원을 같이 졸업했다.

나는 신기남 변호사 사무실 구석방에 신세를 지면서 그해 봄과 여름을 보냈다. 세월이 흐르고 그런 광경들도 소중한 법조계의 역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얘기들도 더 늦기 전에 잡담같이 간간이 써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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