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멀리서 찾아온 친구
노년의 한가로운 시간은 이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이다. 나는 그 노년의 여백을 즐거움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공부하는 즐거움이 있고 글을 쓰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얼마 전 오후 나는 묵호항 부두에서 울릉도에서 오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에는 멀리 호주에서 온 벗이 타고 있었다. 벗이라고 하지만 25년 전 우연히 몇 번 만난 사이일 뿐이다. 그 짧은 만남 속에서도 그에게서 따뜻한 인간의 향기를 느꼈다. 그는 사진작가였다. 빌딩 지하에서 자그마한 양품점을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호주로 이민 가서는 작은 기독교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후원이나 광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고 아내는 집에서 원고 편집을 했다. 그렇게 70대 중반이 가까운 금년까지 34년 동안 매달 잡지를 만들어 왔다. 상업성 있는 화려한 잡지도 아니었다. 교회나 신도를 찾아다니면서 돈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점점 사라지는 인쇄소같이 그들도 늙어갔다.
사람의 관계를 판단하는 데는 육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오랜 인연인데도 어떤 친구는 만날 때마다 얼음같은 냉기가 속에서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물론 말은 부드럽고 매끈했다.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경우를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껍데기 친구일 뿐이다.
그의 경우는 10년 20년을 만나지 않아도 따스한 마음의 향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70대를 훌쩍 넘은 그의 고향 방문은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다. 호주로 다시 돌아갈 그의 뇌리에 동해의 맑고 아름다운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를 각인시켜 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한말의 실학자 정약용은 나중에 어려서 살던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했다. 나는 옛적 현인들의 깊고 은은한 우정을 떠올려 본다. 호남을 대표하던 조선의 하서 김인후 선생의 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과거준비보다 문학을 즐기느라고 10여년 세월을 보냈다. 지금으로 치면 고시낭인 신세가 된 것이다.
낙엽이 떨어지던 가을 어느 날 그의 방으로 키가 크고 얼굴이 단정한 선비가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이퇴계였다. 둘은 밤이 깊도록 대화를 나누면서 친구가 된다. 후일 이퇴계는 영남의 대표학자가 된다. 짧은 만남의 오랜 친구였다.
이퇴계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율곡과 단 한번의 만남으로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이퇴계는 이율곡을 다정한 친구로 대하고 이율곡은 이퇴계를 스승같이 대했다고 한다. 이퇴계는 평생 반찬을 세가지만 먹었다. 나물, 무말랭이, 가지무침이라고 했다. 친구나 손님이 오면 간고등어 한 토막이 상에 더 올랐다고 했다.
나는 선비들의 그런 교류가 좋아 보였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은 소박한 시골밥상이다. 퇴계선생의 간고등어 대신 나는 바닷가 허름한 식당에서 찾아오는 친구에게 회를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
배에서 내린 그는 완연히 늙은 노인의 얼굴이었다. 무거운 촬영 도구를 담은 가방을 진 그의 어깨는 기울어 있었다. 무릎이 아파 계단을 잘 오르지 못한다고 했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고구마 뿌리 같이 또 다른 좋은 친구가 연결되기 마련이다.
오래 전 서울에서 그를 만났을 때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가 빌딩 지하에서 양품점을 할 때 가방에 넥타이를 잔뜩 담아서 팔고 다니던 세일즈맨이라고 했다. 그런 인연으로 친구가 된 사이라고 했다. 넥타이 행상을 하며 한없이 돌아다니던 그 남자는 넥타이 하나로 강남에 빌딩을 지을 정도로 성공했다. 명품 넥타이를 만든 그만의 브랜드도 있었다.
넥타이 장사인 그 남자는 내게 말모양의 무늬가 찍혀 있는 비슷한 두 넥타이를 보여주면서 명품의 의미가 뭔지 알겠느냐고 물었었다. 그는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돋보기로 자세히 비추어 보면 한쪽 넥타이의 말 무늬는 또렷하고 다른 하나는 흐릿하고 말의 모양도 엉성하다고 했다. 얼핏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말의 모양에서 명품이 구별된다고 했다. 그에게서 뜻하지 않은 인생의 깨달음을 선물로 받았다.
인간의 삶도 순간순간 무엇을 하든 완성도를 높이는 게 명품 인생이라는 걸 알았다. 순간이 모여 인생을 이루는 것이다. 이틀동안 열심히 여행가이드역할을 했다. 순간순간 그가 어떻게 하면 즐거울까를 생각했다.?
묵호역에서 그를 태운 기차가 플랫폼을 미끄러져 멀리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랑이란 시간을 내어주는 행위 아닐까. 이 세상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에게 좀 더 잘해주고 싶다. 좀 더 베풀고 싶다. 그리고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고 그냥 즐거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