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노숙인 차림 목사와 ‘선한 사마리아인’

‘착한 사마리아인’. 얀 위난츠 그림

작은 교회 앞이었다. 비가 뿌리고 있었다. 노숙자 한 사람이 교회 입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정물같이 앉아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그의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비에 젖은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배시간이 가까와 오자 한 사람 두 사람 신도들이 그를 보더니 슬쩍 그의 옆을 돌아 교회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연히 검은 뿔테안경을 쓴 퉁퉁한 30대 가량의 남자가 노숙자를 보더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한참을 내려다본다. 그가 노숙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건드리면서 말한다.

“아저씨 여기 이렇게 그냥 있으면 다 젖어요.”

노숙자는 아무 반응도 없다. 그 청년은 핸드폰으로 어딘가로 연락을 한다. 잠시 후 경찰관과 119구급대의 직원들이 출동해 노숙자를 달래고 있다. 추레한 얼굴의 노숙자는 그제서야 구급대 직원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 같다. 잠시 후 구급대 직원과 경찰이 말없이 돌아갔다.

노숙자가 앉아 있는 옆의 작은 식당에서 나온 여성이 노숙자에게 다가가 비닐봉지에 싼 음식을 건네주면서 먹으라고 한다. 그 건물 윗층의 교회에서는 찬송이 끝나고 설교시간이 됐다. 사회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 목사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다.

그때였다. 교회 뒷문을 열고 문 앞에 있던 노숙자가 들어섰다. 비에 젖은 모포를 둘러쓴 그의 얼굴은 때가 낀 머리에 피부가 붓고 갈라진 흉칙한 모습이었다. 신도들은 노숙자의 등장에 불편해하는 표정이었다.

노숙자는 신도들 사이를 터벅터벅 걸어서 강대상 앞으로 갔다. 그는 어깨에 걸쳤던 모포를 내려놓고 머리에 쓴 때묻은 가발을 벗었다. 그 교회의 목사였다. 신도들이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웃사랑이 없는 우리 들이 예수의 팬일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제자일 수 있겠습니까?”

목사가 신도들을 향해 말했다. 신도들의 얼굴에 순간 묘한 수치심과 함께 후회가 피어오르는 모습이었다.

어젯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광경이다. 목사의 그 퍼포먼스 자체가 멋진 설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오르는 행위는 역사에 남을 위대한 설교였다.

나도 그 비슷한 행동을 해본 적이 있다. 냉기 서린 바람이 불던 겨울날 노숙자 같은 차림으로 탑골공원 뒤쪽 골목을 찾아갔다. 인도의 경계석에 노숙자들과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이 전기줄에 앉아 있는 참새들같이 모여 있었다.

그들 속에 끼어들어 법률상담을 하는 ‘거리의 변호사’ 노릇을 해 볼 마음을 먹고 갔다. 좋은 양복을 입고 ‘난 너희와 달라’하는 모습보다 그들 사이에 스며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옷차림 때문인지 누구도 이상하게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후 내 앞을 지나가던 어떤 남자가 내게 뭔가를 손에 쥐어 주면서 말했다.

“이거 손에 쥐고 비벼봐. 따뜻해.”

휴대용인 작은 핫팩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60대쯤의 한 여성이 나에게 털실로 짠 목도리를 주면서 말했다.
“이거 저기서 받은 건데 목에 둘러요. 그러면 안 추워요.”

잠시 후 지나가던 다른 남자가 들고 있는 걸 보이면서 말했다.
“이거 기모바지인데 저쪽에서 공짜로 나눠주고 있어. 입어.”

또 다른 여자가 지나가면서 내게 정보를 알려주었다.
“저기 탑골공원 뒷담 쪽에서 자원봉사 나온 사람들이 약을 나눠 주는데 가서 받어.”

나는 그곳에 왜 사람들이 모이는지 알 것 같았다. 그곳은 따뜻한 인정이 흘러넘치는 웅덩이였다. 옷을 잘 차려입고 갔다면 발견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곳에 인간들이 오글오글 모여있는 것 같았다.

옷을 차려입고 위선적인 어투로 서로 인사하면서 만나는 건축물인 교회는 사교장이지 진정한 신을 모시는 곳이 아닌 것 같다. 교회뿐 아니라 사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이웃을 향해 미소짓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이웃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