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⑩] “주제사상 본질 등 가려있던 창을 열어주다”

“주체사상은 새로 등장한 하나의 민족종교 같았다. 우리시대 운동권들은 독재에 대해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80년대 이후 운동권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으로 돌아서고 혁명을 추구했다. 그 운동권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종교적 움직임같이 변해 있는 것 같았다.”(본문 중) 사진은 주체사상탑

정보기관은 내게 가려져 있던 창을 열어주었다. 냉전시대 반공을 위해 금지됐던 책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보기관의 자료실에는 김일성 주체사상이 있고 김일성 선집들이 있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모택동주의에 관한 책들이 있고 중공이나 북한 사회의 현실을 리얼하게 표현한 소설들이 있었다. 남한의 운동권에서 사상 교양을 강화시키기 위해 만든 각종의 지하 유인물들이 있었다. 반대편 시각에 바라본 자본주의와 미국의 패권주의에 관한 자료들도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읽으면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졌다. 북한에서 인민위원장을 했던 사람도 만나 북의 귀족층의 삶을 얘기 들었고 사회안전부 간부를 했던 사람을 통해 북의 부패상을 듣기도 했다. 그동안 나의 눈을 가렸던 비늘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나는 6.25전쟁에서 중공군이 북을 도와 한반도를 침략했다고 단순하게 알고 있었다. 국정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통해 알게 된 상황은 달랐다. 당시 미군사령관 맥아더와 모택동의 시각은 우리가 알듯 단순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기회에 중국에서 잃어버린 미국의 패권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북한과 만주 쪽에 핵폭탄을 열개쯤 떨어뜨리려는 작전을 생각했다. 일본을 핵 두 방에 무조건 항복시켰다. 그게 핵의 위력이었다. 모택동은 그걸 감지했다. 그리고 중국의 상해나 홍콩 등 해안의 도시에 핵이 떨어질 걸 두려워했다. 모택동은 어차피 벌어질 전쟁이라면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우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부하 장군 팽덕회에게 백만대군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가게 했다. 북한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주의와 중국의 충돌이고 국제전이었다.

중국은 청나라 시절부터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등 제국주의국가에게 살을 뜯어먹히는 약한 존재였다. 모택동은 중국으로 부터 제국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영웅이었다. 팽덕회가 이끄는 중공군은 미군과 싸우면서 평택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때 미국은 모택동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평택을 경계선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그 휴전 제의를 거절했다. 모택동이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으면 지금의 서울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 대부분은 북한 땅이 됐을 것이다.

비밀이 해제된 미국의 백악관 문서에는 당시의 상황이 나온다.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자 백악관은 망신 당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강구했다고 적고 있다. 중국이 한반도에서 미국과 전쟁해서 승리했다고 기념하는 걸 뒤늦게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중공군의 분석자료를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시각이었다.

나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어땠을까.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북한은 ‘천리마운동’이라는 강제노동으로 국민을 괴롭히는 체제라고만 배웠다. 북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도 없었다. 국가가 원하는 대로 나의 뇌는 채색됐었다. 북한은 괴뢰국가이고 북한 군대는 괴뢰군이었다.

나는 주체사상과 김일성 선집을 읽어가면서 나의 인식의 수면 위에 돌이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일성은 러시아도 중국도 도와주지 않는 상태에서 오직 조선 인민의 힘만으로 6.25전쟁 이후 경제를 살려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미군이 서울에 주둔하고 미국이 건네주는 돈이 아니면 예산을 짤 수 없는 남한이야말로 국가가 아니라 미국의 괴뢰라고 했다.

김일성은 후손들에게 구체적인 국가사업계획도 예언하고 있었다. 앞으로 남한기업들은 북한의 철로를 통과해 상품을 수출하고 러시아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다.

그런 때 통행료만 받아도 북한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 사업에서 남측의 재벌그룹과는 상대하지 말고 중소기업을 협상대상으로 하라고 했다. 재벌그룹들은 사기꾼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주체사상의 내용도 정통공산주의와는 다른 것 같았다. 차라리 새로운 종교의 경전이나 모세의 율법 비슷하다고 할까. 북한은 세계 속에서 미군에 포위당한 채 버티고 있는 고립된 성 같다는 느낌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굶어 죽어도 그 원인이 미국의 경제제재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핵 개발만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신앙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이미 사회주의가 아니라 농성체제 속의 군사독재였고 주체사상이 경전인 종교국가였다. 어느 날 수사국의 책임자가 나를 방으로 불렀다.

“주체사상을 읽어보니 감상이 어떻습디까?”

“마르크스 레닌주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념입니다. 민족주의와 유교사상이 들어있는 북한의 독특한 사상체제라고 할까요? 어떤 면으로는 성경을 읽는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민대중’이 있고 선지자의 자리에 수령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 속 이스라엘 민족이 주변 강대국의 핍박을 받듯이 조선민족이 미제국주의의 억압을 받는다는 구조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영생을 주체사상은 영원한 정치적 생명으로 풀어놓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체사상은 새로 등장한 하나의 민족종교 같았다. 우리시대 운동권들은 독재에 대해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80년대 이후 운동권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으로 돌아서고 혁명을 추구했다. 그 운동권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종교적 움직임같이 변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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