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⑫] ‘노랑신문’과 ‘존안자료’
청와대의 한 비서관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선거캠프에 있다가 청와대 비서관으로 들어왔을 때 참 막연한 심정이었어요. 정책을 기안할 자료도 없고 어떤 방향으로 갈지도 막연했죠. 정부 부처에 자료를 요구해도 대부분 단편적인 내용이고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 때 안전기획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보면 이건 완전히 모범답안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방향과 정책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문제점이나 효과까지 기록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정보기관 보고서의 긍정적인 면이었다. 그 대통령 비서관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대통령만 보는 최고급 보고서들이 따로 있어요. 정책에 관련된 것들은 물론이고 장차관이나 국회의원 군 장성들의 이면에 대한 보고죠. 대통령의 입장에서 통치를 하려면 신문에는 나지 않는 그런 이면의 내용들이 필요한 거죠.”
당시 세상의 기자들은 정보기관에서 만들어지는 보고서를 ‘노랑 신문’이라고 불렀다. 비서관의 말이 노랑신문이 만들어지는 목적인 것 같았다. 나는 그 노랑신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궁금했다. 언론사 기자들이 다 정의롭고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쓰레기 같은 기자들이 있어 기레기라는 말도 나왔다.
마찬가지로 정보관도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정보관 중 상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국가관과 충성심이 뚜렷한 것 같았다. 보고서의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밤을 지새기도 했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정부 조직에서 국민을 직접 대하는 사람은 순경이나 동서기이듯 정보조직에서도 그런 중하급 정보관들이 있었다. 중급 정도의 정보관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정보조직에 들어온 지 10년쯤 됐다는 몸집이 뚱뚱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이었다. 엘리트출신이 아니고 전직 뮤지션이라고 했다. 음악을 하던 사람이 왜 그곳에 있는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양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음악인 출신답게 그는 쉽게 마음문을 열었다.
“이 기관이 법적으로는 간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임무지만 간첩들이 미쳤습니까? 자기 정보를 흘리고 다니게. 그런 정보는 모래밭에서 바늘찾기예요.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이 조직이 대공업무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까 정치정보예요. 왜냐하면 그걸 수집해 와야 잘 팔리니까 말이죠. 우리 정보의 독자는 대통령을 비롯해서 권력의 높은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쓸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은 김대중이나 김영삼 같은 야당지도자에 대한 정보를 좋아하죠. 야당국회의원들의 금전관계나 여자문제 같은 것도 좋아해요. 재야인사들의 동향첩보도 요구하죠. 그런 내용들을 써내야 기자들이 특종을 하듯 A급 판정을 받고 승진에 유리하게 되죠. 꼭 야당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예요. 대통령이나 총리, 재벌 회장이나 장관의 사생활 첩보도 위에서 아주 좋아해요.”
“그런 보고서를 어떻게 만들죠?”
“당연히 기본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하죠. 정보관들은 자기가 목표로 하는 대상인물을 정하고 오랫동안 일간신문, 주간지 월간지들을 꼼꼼히 읽고 스크랩해서 정리해 둡니다. 거기다 우리 조직에 있는 존안자료를 추가해서 파일로 만들고 그것들을 머리 속에 저장해 두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한 인간에 대한 흐름이 느껴지죠. 그런 기본지식들이 머리 속에 차면 그 다음 단계로 대상이 되는 인물의 측근이나 보좌관 같은 사람을 포섭하는 거죠. 본인보다 아래 사람들이 더 객관적으로 대상인물을 평가하고 있죠. 정보요원과 그런 보좌진은 일종의 공생관계이기도 합니다. 필요하면 도청장치를 설치해 놓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조직에 있는 비밀 녹음기는 사용하지 않아요. 그걸 쓰다가 발각되면 큰일 나고 빌리는 절차가 까다로우니까요. 세운상가 전자 기술자에게 부탁해서 만든 특수도청장치를 개인적으로 사서 사용하고 있어요. 그렇게 추적하다 보면 한마디만 들어도 어떤 추론이 가능해요.”
한 인간에 대해 맨투맨으로 지독히 파고드는 세상이었다. 정치인 뿐이 아니었다. 장관 내정자나 대법관, 장성 등이 모두 그 대상인 것 같았다. 그런 기록들이 정보기관 내부에 존안자료라고 해서 보관되어 있었다. 또 다른 철저한 인사검증 시스템인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