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⑦] 육사 출신 사명감 불타던 그는 훗날 국정원장에···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재판받던 그를 변호하다
[아시아엔=엄상익 변호사, 대한변협 대변인 역임] 나는 해외정보를 담당하는 고급 간부와 만났다. 변호사 시절부터 알던 정보관으로 나중에 국정원장이 된 인물이다. 어느 날 정보기관 안에서 그와 만나 차를 나누면서 편하게 대화를 나눌 때였다.
“저는 프레드릭 포 싸이트가 쓴 첩보 소설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국내 작가 김성종씨가 쓴 ‘제5열’도 읽었구요. 소설 속의 정보기관과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육사 출신인 저도 영어 교관생활을 하면서 첩보소설을 좋아해서 꽤 많이 읽었어요. 외국의 첩보소설을 번역해서 책을 내기도 했구요. 그러다가 장교 신분으로 해외 정보요원이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죠.”
“중앙정보부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불법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주국가에서 왜 그렇게 불법을 저지르고 국제적인 망신을 하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동백림사건과 김대중 납치사건을 머리 속에 떠올리면서 물었다.
“너무 좁게 단선적으로 보시지 말고 조금 넓게 생각해 보실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경쟁에 이기면서 대한민국을 일정 수준으로 급히 올려야겠다고 결심했죠. 원래 민주주의란 말이 많고, 국가경영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박대통령은 말이 많고 정쟁이 심한 걸 보고 혁명을 일으킨 분 아닙니까? 근본적으로 정당정치를 좋아하시지 않았죠. 박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을 강제로라도 몰아갈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죠. 양떼를 초원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양치기 개도 필요한 겁니다. 그런 배경에서 중앙정보부가 탄생한 겁니다. 우리 주변은 소련이나 중공 그리고 북한 등 모두 힘이 강한 공산권 국가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수 십년 동안 섬같은 존재로 있습니다. 중동의 아랍국가들 사이에서 생존하는 이스라엘 비슷하죠. 이스라엘은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 그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음지에서 치열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적국의 지도자를 암살하기도 하고 온 세계에 스파이를 보내 첩보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법을 넘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 이스라엘의 모사드 같은 기관이 필요했던 겁니다. 우리나라의 특성상 미국이나 영국같은 발달된 민주국가의 정보기관같이 할 수는 없었어요. 정보와 수사를 합쳤어요. 강력한 힘을 한군데 모은 거죠. 뿐만 아니라 정보기관을 대통령 직속으로 해서 정부조직들에 대한 조정통제권도 부여했어요. 정보기관의 행위가 대통령의 명령이나 마찬가지의 힘이 되게 한 거죠.”
“그래서 목적을 벗어난 월권행위가 있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일부 요원들의 과격성이나 일탈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조직이든지 그 수준은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정보기관은 창설 당시 군 특무대나 헌병대 출신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이 일해 온 방식으로 처음에 운영된 면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점점 정보요원의 질을 향상시켰습니다. 대학 시절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장 출신들을 여러 명 스카웃했습니다. 지금 간부 중에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동시에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을 공개 채용해서 엘리트 요원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지 한 계통의 사람만 쓰다 보면 파벌이 형성되고 자리들을 독점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어느새 그렇게 공채로 들어온 대학출신 엘리트 요원들이 주류를 이루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휘부에서는 그들을 견제할 수 있도록 지금 다양한 엘리트들의 영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처음으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사법 행정 고시 양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스카웃했습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조직의 지도자가 될 것으로 봅니다. 미국의 CIA도 변호사 출신이 만들었습니다. 제 생각으로 엄 변호사도 앞으로 수준 높은 정보기관을 만드는 계획에 참여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조직의 혁신을 위해 외부의 신선한 시각을 요구하니까요.
국익이니 비밀이니 하고 너무 폐쇄적이 된다면 조직은 정체될 겁니다.”
의외로 그는 담백하고 정직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근대화라는 목적을 위해 말 많고 정쟁이 심한 정당정치보다는 정보정치를 선택했던 것 같았다. 당연히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과 돌과 돌이 부딪치듯 불화할 수밖에 없던 운명인 것 같기도 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내게 정보기관을 대변하던 그는 훗날 국정원장이 됐다. 그리고 국회에서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순수정보기관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의 무죄변론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석방된 그는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으로 놀러왔가 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