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그는 영화나 드라마의 괴물 같은 국정원장이 아니었다
38년 전쯤이다. 30대 초반이던 내가 사는 아파트 옆집에 40대 중반의 남자가 살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아저씨였다. 그 집의 열린 창문에서는 때때로 찬송가 연주가 작게 흘러나오곤 했다. 이웃집 남자는 내가 다니는 교회의 구역장이었다.
한번은 그가 우리 아파트로 건너와서 예배를 인도했다. 기도가 끝난 후 다과를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할 때였다. 그는 나의 변호사 일이 어떤지를 물었다. 나는 남의 곗돈 이자 계산이나 하고 봐달라고 판사 바짓가랑이나 붙잡고 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보기관에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다이나믹한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 무렵 스파이소설을 읽고 정보기관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때였다. 나는 그에게 정보기관에 잠시 들어가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정보기관에 들어가 보게 됐다. 정보조직 안에서 아파트 옆집 남자를 다시 만났다. 밖에서 보던 그와는 달리 그는 힘든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비밀조직 내부에서도 경쟁이 치열한 것 같았다. 마음 착한 그는 냉정한 정보조직에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나는 몇 년 그곳을 경험하고 나와서 다시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렸다. 어느날 그가 찾아왔다. 퇴직금을 사기당했다는 것이다. 노후 살아갈 자금을 털렸던 것이다. 그를 위해서 소송을 제기해 주었다. 판사는 정보요원이 사기를 당할 리가 없다고 했다. 그게 세상의 인식인 것 같았다. 직업과 상관없이 그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 얼마 후 신문을 보다가 그가 국정원장으로 임명됐다는 기사를 봤다. 이미 70대를 넘은 나이인데 정보조직 총수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훌륭한 국정원장이었다. 권력에 아부하면서 정치공작을 하던 기존 정보기관장들과는 달랐다. 인권유린 행위도 철저히 금지시키겠다고 국회에서 약속했다.
대신 그는 큰 일을 저질렀다. 김정은 암살공작을 시도했다가 성공 직전에 발각된 것이다. 김정은은 조선중앙방송 등 모든 언론매체를 통해 남조선의 국정원장인 그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정보기관장이 적국 지도자를 암살하려는 것은 역사상 종종 있던 일이다.
그가 국정원장으로 있을 때 밥을 같이 먹자고 직접 전화를 했었다. 비서진을 통해 폼 잡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약속 장소인 호텔에 평범한 캐주얼 차림으로 나갔다. 호텔 문 앞에 경광등이 번쩍거리는 경호 차량들이 서있었고 그 앞에서 경호요원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김정은이 목숨을 노리니까 그런 것 같았다.
우동과 초밥 1인분을 시켜 그와 나누어 먹으면서 속내를 털어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그는 70살 넘어 국정원장을 하니까 힘들어서 초창기에는 과로로 쓰러질 것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후 정국이 변하면서 ‘촛불혁명’이 났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고 국정원장이던 그가 뇌물공여범으로 구속되는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이다. 정변이 생기면 권력자는 그렇게 거센 물결에 휩쓸리게 마련이었다.
나는 그의 변호인이 됐다. 내용은 별 게 아니었다. 대통령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청와대에 지원했던 예산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 명령에 순응했을 뿐이었다. 그를 증언해 줄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뿐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모든 걸 거부한 채 굴 속 두더지처럼 감옥 안에서 버티고 있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취지로 글을 써서 보냈다. 자신은 입을 닫더라도 직속부하였던 국정원장의 억울함은 상관으로서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반응을 보였다. 재판부에 그는 청렴한 사람이라고 글을 써서 보내주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그를 기소했던 검사가 대통령이 되어 그를 사면했다. 정치란 그런 것 같았다. 며칠 전 내가 묵는 동해 바닷가의 실버타운으로 그가 찾아왔다. 포구의 허름한 횟집에서 매운탕과 밥을 먹으면서 회포를 풀었다.
그는 나의 기도방법인 시편 23장 필사를 감옥 안에서 1200번 달성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글로 권했었다. 역대 정보기관장 중 유일하게 정보전문가 출신인 그에게 정보기관의 변화를 추구하고 정보요원들의 프라이드를 살리는 글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내가 본 국정원장, 그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거대한 괴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