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나의 자화상을 물끄러미…

“나는 이기려고만 하고 질 줄을 몰랐다. 변호사란 현대판 승부사였다. 카드 한장에 인생을 거는 카지노의 도박꾼같이 승리에만 쾌감을 느꼈다. 이길 건 이겨야 하고, 질 건 져야 한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지는 것도 마음의 근육이 필요했다. 마음의 넓이, 유연함, 너그러움이 있어야 했다. 각박하게 살아온 내가 떠난 자리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아무런 향기도 흔적도 없는 삭막한 허공이 아닐까.” 사진은 피카소 자화상

법무장교 동기생 중의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 그는 나이를 먹었어도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동기생들에게 사과 한 상자씩을 택배로 보냈다.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가 죽은 후 문 앞에 덩그라니 남은 사과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삶을 마치고 떠나간 후 그의 빈자리 같았다. 마음이 애잔했다.

법무장교 훈련 시절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했던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군대 시절 내가 모략을 받은 적이 있다. 보안부대에서 내가 뇌물수수의 혐의가 있다고 첩보를 올린 것이다. 아마도 지역 보안부대장과 싸운 것이 그런 보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당시 그 기관은 국가권력의 정점이었다. 그곳에서는 흰 걸 검다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육군본부에 소환되어 조사 받았다. 이미 나는 제단에 오른 속죄양이었다. 잘못이 있든 없든 죄인이 되어야 했다. 논리적으로 “너는 죄인이어야 한다”는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 함정에 빠진 나는 냉냉한 분위기 속에서 외롭고 추웠다. 그때 그가 나서주었다. 그는 나의 결백을 증명해 주고 모략의 올가미를 풀어 주었다. 그는 제대하고 검사가 되어 활약을 했다.

50대 중반 그가 암에 걸렸다. 덩치가 좋던 그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그는 병을 이겨내기 위해 약에 관해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이었다. 그를 만난 내가 “나도 아프다”고 했다. 그 며칠 후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어느 제약회사에서 만든 약을 먹으라고 하면서 세밀하게 그 효능들을 알려주었다. 진심과 걱정이 밴 따뜻한 말이었다.

그 얼마 후 그가 죽었다는 통보가 왔다. 나는 그의 관이 들어간 소각로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는 나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향기로운 꽃이 송이송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떠난 후의 뒷자리를 생각해 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매일 현실의 손익만을 계산하는 이기주의자였다. 이익이 있으면 움직이고, 손해가 날 것 같으면 피했다. 신세를 지려고만 했지 베푸는데 약했다. 어쩌다 약간의 도움을 주면서도 속으로 주저하고 아까워했다.

나는 이기려고만 하고 질 줄을 몰랐다. 변호사란 현대판 승부사였다. 카드 한장에 인생을 거는 카지노의 도박꾼같이 승리에만 쾌감을 느꼈다. 이길 건 이겨야 하고, 질 건 져야 한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지는 것도 마음의 근육이 필요했다. 마음의 넓이, 유연함, 너그러움이 있어야 했다. 각박하게 살아온 내가 떠난 자리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아무런 향기도 흔적도 없는 삭막한 허공이 아닐까.

나는 요즈음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해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라고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노년의 한적과 여백을 재미있고 좋은 일로 채우려고 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즐기려고 한다.

매일 해변을 맨발로 걷다 보면 모래에 발자국이 찍힌다. 똑바로 걸었다고 생각하는데 돌아보면 삐뚤빼뚤하다. 내 인생이 그런 것 같다. 하얀 파도가 은혜같이 다가와 내 흉한 발자국들을 지워준다.

나는 매일매일 내 삶의 발자국을 수필 형태로 남기고 있다.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는 아이처럼 그냥 재미로 몰입하고 있다. 나중에 시간의 파도가 소리 없이 지워줄 것 같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것인 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 투명한 시간을 나는 즐기고 있다. 인생의 늦가을은 시간이 귀하다.

내 마음의 오지에서 환영과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한다. 지나온 생의 길가에서 피어났던 꽃과 나무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이 마음의 영상에 나타난다. 기쁨의 순간과 좋았던 일들도 나타난다. 잠안오는 밤이면 가슴 저 밑에서 강물이 출렁거리는 것 같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자신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많은 걸 단념한다. 노력은 해 보지만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삶에는 제 몫과 제 몫이 아닌 것이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자유롭게 자기답게 진정한 나 자신을 살아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언제 죽어도 미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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