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늙음을 위한 변명
사람들이 파도같이 오가는 지하철역 계단 가운데 한 노파가 쭈그리고 앉아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살아온 삶이 투명한 배경 화면처럼 배어있는 느낌이다. 어느 날 노파가 독오른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글쎄 저 년이 나보고 젊어서 뭘 했길래 이렇게 사느냐고 그래요. 그래 야 이 년아 너도 늙어서 나같이 돼라.”
노파는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50년 세월 저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20대 초 깊은 산골 절에서 묵을 때였다. 그 절의 마당 구석에 벌통이 놓여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마당을 거닐다가 벌통 아래서 꿈틀거리는 것들을 보았다. 다가가 보니 늙은 벌들이 바닥에 버려져 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기고 있었다. 벌의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끝난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젊은 벌 두 마리가 내려와 양쪽에서 늙은 벌의 날개를 물고 들어 올려 멀리 날아갔다. 늙은 벌은 그렇게 멀리 내다버리는 것 같았다.젊은이들에게 지하철 노파는 늙은 벌 같은 존재일까.
젊은 시절 교회에 가면 중년의 목사는 이따금씩 젊음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축복이고 감사인지 아느냐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젊음은 영원히 존재할 것 같았다. 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늙음은 오히려 나와는 상관없는 재앙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미녀가 스포츠카를 타고 파도치는 바닷가를 드라이브하고 있었다. 차가 휴게소에 들어가 멈춰 섰을 때 미녀가 갑자기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에게 걸렸던 어떤 마법의 주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미녀의 손이 살짝 내려지면서 갑자기 스크린 화면에 주름이 가득한 노파 얼굴이 나타났다. 늙음은 재앙이 맞았다.
투명한 모래시계 속처럼 세월이 빠져나갔다. 어느 날 아침 양치질을 하는데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도 눈썹에도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 기슭에도 눈송이들이 춤을 추며 내려 쌓이는 것 같았다. 영원할 것 같은 젊음이 어느 순간 증발해 버리고 하루하루 비루하게 늙어가던 걸음이 담장 모서리에 멈춰 선 것 같았다.
지난 2년간 한적과 완만한 죽음이 지배하는 듯한 바닷가 실버타운에 묵었다. 먼 인생길을 걸어 끝자락에 온 사람들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90대의 한 노인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줄 알았더니 어느 한 순간에 떠나는 삶인 걸 알았다고 했다. 자기는 밤과 저녁 잔광 사이의 아주 작은 틈을 즐기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자고 일어나 눈을 뜨는 게 그에게는 기적이고 하늘이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그는 수십년간의 사명을 끝내고 먼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수락한 것 같았다. 아름답게 저물어가는 인생이었다.
노인들의 세상은 여태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평등한 사회였다. 대학 때 원서로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던 노인이 혼자 따돌림 당해 구석에서 밥을 먹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아파트가 여러 채 있다고 으스대던 노인을 속으로 바보 취급하면서 멀리하는 것 같다. 더이상 미남도 추남도 없는 것 같은 사회다. 잘난 척, 배운 척, 있는 척하지 말라는 게 노인나라의 율법이다.
지혜 있는 노인들은 과거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돈의 많고 적음은 동네 골목에서 병정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던 어린시절에 비유했다. 해가 지고 엄마가 들어와 닦고 자라는 말을 듣고, 하던 놀이를 중단하고 아이들은 집에 잠이 들기 직전이라고 했다. 낮에 놀다 방 구석에 놓은 딱지나 병정놀이 계급장 같은 세상의 재산이나 과거의 지위는 더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노인 나라로 오니까 젊은 날 저질렀던 어리석은 짓들이 후회가 된다. 무책임하게 너무 빨리 움직였던 혓바닥, 무의미한 감정싸움들, 생각 없이 함부로 써낸 글들이 있었다. 자존감이 약해 스스로 주눅 들었던 비루한 삶에 대한 후회가 엄습한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노인이라는 명칭으로 평등하다. 늙어서 경쟁 없는 평등한 세상에 오니까 편안해지기도 한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노인을 보지 못했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가장 젊었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노인 나라로 오니까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아니 보이던 것들의 실체가 비로소 선연히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을 마감할 때 성숙한 정신적 존재가 되기 위한 최후의 과정이 늙음인지도 모른다. 몸은 쇠약해 지지만 영혼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