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400년전 선비가 보내온 메시지

“내 속에는 두 개의 내가 있다. 하나는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본능적 육체적인 즐거움을 찾는 파충류가 기어다니고 있다. 그 모두가 내가 아닐까. 김성탄이라는 이름의 그 선비가 어제와 오늘의 나의 스승이었다.” <사진 엄상익>

낡은 책 속에서 우연히 400년 전 한 선비의 수필을 보았다. ‘유쾌한 한때’라는 제목으로 서른세 가지의 즐거움을 나열했다. 고매한 선비답게 봄날 저녁 로맨틱한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는 것이라든가, 서재 앞에 파초를 심고 비 멎은 후 아름다운 햇빛이 쨍쨍 내려쬐고 나무들이 목욕을 한듯 싱싱한 걸 보고 좋아했다. 그는 겨울밤 고요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땅위에 눈이 쌓이는 걸 즐겼다.

그의 즐거움에는 선비다운 면도 있지만 의외로 관능적인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음부에 조그만 습진이 생겼다. 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더운 물에 담그니 유쾌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얘기하고 있었다.

땀이 온몸을 폭포처럼 쏟아지는 여름날 소나기를 맞으면서 좋아했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왕벌을 내쫓으니 좋다고 했다. 방으로 들어온 쥐가 고양이에게 쫓겨가는 걸 상쾌해 했다. 여름날 오후 큰 소반 위에 새빨간 수박을 자르면서 좋아했다. 집 벽에 회칠을 하고, 마루를 깨끗하게 쓸고 닦으며, 문에 종이를 바르고 벽에 서화를 거니 좋다고 했다.

그 선비는 동네에서 가장 지독한 노랭이가 죽은 걸 시원해하고, 누군가 날리던 연줄이 끊어져 연이 날아가는 걸 보고 고소해 했다. 벌판에 불이 붙는 걸 보고 재미있다고 했다.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선비가 돈을 꾸려고 찾아와 차마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그를 데리고 빈 방으로 들어가 몰래 돈을 꾸어주고 기분 좋아했다.

낡은 기록 속에서 다양한 면을 가진 인간의 본질을 본 것 같았다. 그 선비를 보면 음부의 습진도 행복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여러 자잘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전립선이 비대해지고 변비가 있다. 통풍과 요로결석이 있다. 진땀을 흘리면서 고통에 시달리다가 평온이 돌아오면 그게 천국이다. 내장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행복하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불행하다.

400년 전의 그 선비를 따라 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보았다. 내 방은 그 선비의 집같이 왕벌이나 쥐는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새벽녘의 귀뚜라미 소리가 내 마음을 보라빛 우수로 적신다. 투명한 그 소리는 밤의 적막을 깨는 게 아니라 돕고 있다. 아침을 알리는 닭의 치솟는 울음도 정겹다.

어린날 시골 할머니의 초가집에 있던 시간들이 다가와 서성거리는 것 같다. 창을 통해 드넓은 회색 바다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면 기쁨이 안개같이 피어오른다. 황혼이 되고 노을이 질 때면 인적이 드문 해변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다. 부드러운 파도가 밀려와 내 발등을 어루만지며 고운 모래 속으로 스며든다. 노을이 잠기는 바다가 아름답다.

그 선비는 아내의 비녀를 맡기고 술과 안주를 사는 것이 즐겁다고 했지만 나는 작은 맛집들을 찾아다닌다. 어제는 차돌떡뽁이를 먹고 그저께는 퓨전 찹쌀탕수육을 먹었다. 그 전날은 샐러드와 고구마 피자로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과거의 시간 속에도 곳곳에 기쁨이 숨겨져 있었던 것 같다. 소년 시절 고요한 함박눈이 쏟아지는 골목길을 한없이 걸었다. 하얀 눈이 가난한 동네의 모든 걸 덮어주었다. 그 눈에서는 투명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사백년 전 선비의 글이 전해준 메시지는 무엇일까. 본질적인 행복은 육체와 정신 그리고 잠재의식 속 욕망에 모두 걸쳐 있는 복합적인 걸 말해주는 건 아닐까.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게 행복의 기본이다. 육체를 도외시한 고차적인 정신적 행복은 없다. 돈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다음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야산의 잡초 사이에 살다가 가는 들꽃같이 그런 작은 행복도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 같다.

특이한 건 그가 남이 망하는 걸 보면서 기분좋아 했다는 것이다. 연을 날리던 사람의 연줄이 끊어지면 즐거운 것일까.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그런 걸 즐기는 잔인한 욕망이 숨어있는 게 틀림없다. 그 선비는 그걸 노골적으로 용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 속에는 두 개의 내가 있다. 하나는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본능적 육체적인 즐거움을 찾는 파충류가 기어다니고 있다. 그 모두가 내가 아닐까.

김성탄이라는 이름의 그 선비가 어제와 오늘의 나의 스승이었다. 그는 중국 명말 청초의 문예비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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