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백합조개 줍는 노인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가 잠시 멈춘 오전에 해변으로 나갔다. 밀려오는 파도가 물러나는 파도에 부딪쳐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맨발로 조수가 빠져나간 평평하고 고운 모래 위를 걷는다.
아침 바다가 파랑과 남색이 섞인 오묘한 빛을 띠고 있다. 한옥마을 앞까지 갔을 무렵이었다. 한 남자가 해변에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찾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무장화에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옆에는 물고기나 조개를 담는 어구가 놓여있었다. 이상했다. 조개를 채취하려면 투명한 바다 밑바닥의 모래를 뒤져야 했다. 그렇다고 그가 물고기를 잡는 것도 아니었다. 호기심이 일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뭘 하고 계십니까?”
내 말에 그는 들고 있던 엄지 손톱만한 조개껍질을 보이면서 말했다.
“이게 백합조개예요. 이것들을 주워다가 꽃을 만들고 있어요.”
“꽃이라뇨?”
내가 되물었다. 그는 얼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영상 앨범에서 사진을 확대해 내게 보내 주었다. 수많은 크고 작은 백합조개 껍데기를 정교하게 붙여서 만든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꽃뿐만 아니라 조개껍질로 만든 소나무작품도 있었다.
“대단한 솜씨네요. 공예품을 만들어 파시는 겁니까?”
“아니예요. 평생 다른 직업에 있었어요. 애들 다 키워 결혼시키고 정년퇴직을 하고 동해로 내려왔어요. 부부 둘이서 주공아파트를 얻어서 살아요. 제가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잘했어요. 초등학교 때 종이와 고무줄로 만든 제 글라이더가 제일 멀리 날아가곤 했어요. 노년이 된 지금은 여기서 백합조개 껍데기를 모아다가 꽃을 만드는 게 일과예요. 취미라고 해도 전시회를 연 적도 있어요. 작품이 팔린 적도 있죠.”
노년의 시간을 독특하게 보내는 사람이었다. 한적한 바닷가에서 재미있게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얼마 전에는 옥계의 해변으로 내려와 15년 동안 한시(漢詩)를 짓고 안개속 그림자와 춤을 춘다는 신선같은 노인을 만나기도 했다.
나는 고독을 즐기는 특이한 사람들을 바닷가에서 종종 발견한다. 한번은 밤중에 바닷가로 나간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 같이 허공에 파랗게 떠 있는 작은 불빛 두 개가 보였다. 낚싯대 끝에 달려 있는 불빛이었다. 그 앞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등 윤곽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는 고기를 잡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한밤의 투명한 정적을 즐기는 것일까. 그렇게 고독을 즐기는 사람들을 종종 봤다.
파도소리가 어둠으로 스며드는 한밤중에 바닷가 작은 텐트 안에서 혼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차를 바닷가에 세워두고 그 안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 파도가 굉음을 내고 부서지는 갯바위 위에 위태롭게 서서 낚싯대를 잡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혼자서 노는데 안정감과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그들에게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투명한 시간을 즐기는 즐거움인 것 같다.
나는 요즈음 평생 하던 변호사업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몇 사건 남은 재판 때만 법정으로 간다. 변호사를 45년 해오면서 직업적 스트레스가 있다. 찾아오는 의뢰인은 그들의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었다. 들어주고 들어줘도 그들이 끝없이 징징거리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변호사인 나에게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체를 맡긴 듯 고통을 쏟아 놓았다. 연민과 피로로 내가 휘청거리기도 했다. 도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신병자도 있었다. 소송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끈끈한 탐욕이 붙어있기도 했다. 외눈박이거나 눈을 뜨고 있어도 볼 수 없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의 들끓는 아우성 속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나는 노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보았다. 사람들의 성향은 여러가지다. 떼를 지어 어울려야 재미있어 하는 참새족도 있다. 혼자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노래부르는 종달새도 있다. 높은 공중에서 선회하는 독수리도 있다. 나는 어떤 족속일까? 나는 석양을 가슴에 받으며 어두워지는 바다 쪽으로 날아가는 갈매기 조나단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혼자 있어도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범이 있으면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것 같다. 기도와 글쓰기. 독서와 산책이 루틴의 일상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높이 날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