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노년의 수행처
류영모 선생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사업을 접고 북한산 자락에 집을 마련해 그곳에서 경전을 읽는 생활을 했다. 그는 매일의 명상을 일지 형식으로 적었다. 그게 책으로 나온 것이 <다석일지>다.
그는 매일 명상을 글로 쓰는 것이 기도라고 했다. 가을 계곡물 같이 맑은 그의 노년의 삶이 신선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 왔다. 천안의 풍산공원 그가 잠들어 있는 묘지에 노란 치자꽃을 한 송이 바치고 나도 글쓰기를 기도로 삼았다.
노년을 어디서 지낼까 하다가 동해바닷가 한적한 실버타운으로 내려온 지도 2년이 되어 간다. 어느새 환경에 익숙해진 느낌이다. 불교에 “한 나무 아래 사흘 이상 있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장소에도 집착이 생긴다는 뜻 같다.
글을 블로그에 올리다 보니 댓글을 주시는 분들과 영혼의 친구가 된 것 같다. 만나지는 않았어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뜻이 같아진다고 할까. 그 중 한 분이 흥미로운 제안을 보내주었다. 은밀한 기도처 내지 수행처를 경매 등을 통해서 구해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하기를 권한다고 했다.
의식주 생활도구들을 취향대로 하나씩 구해 스릴 넘치는 모험에 뛰어들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 분은 이왕 한 거면 시편 23장을 만번 써보라고 했다. 숫자가 힘이고 에너지이고 기적을 만들어 내는 비밀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런 특이한 조언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주변 사람을 통해 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사실로 그분의 뜻을 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젊은 날 실패는 절망이고 슬픔으로 여겼다. 살다 보니 그것은 방침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섭리인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분이 전달하는 메시지들을 진작 알아차렸더라면 인생이 훨씬 평안했을 것 같다.
우연히 바닷가에 집을 마련하게 됐다. 내가 이따금씩 가는 식당이 있다. 외국 생활에서 돌아온 젊은 부부가 해안로에 자리를 잡고 운영하는 집이다. 어느 날 식당에 밥을 사 먹으러 갔을 때 젊은 주인이 바닷가에 있는 자기 집을 사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1년 전에 경매로 구입했는데 팔고 싶다고 했다. 그 집을 가보았다.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동해항과 빨간 등대가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내게는 완전한 집도 아니고 기도장소도 아니지만 내가 나에게 깊어질 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즉흥적이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그분이 내 마음을 움직여 삶을 조정하는 것 같다고 할까.
20여년 전에도 비슷하게 집을 구입한 적이 있다. 이태리의 카프리섬을 구경한 후 육지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였다. 거기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 중 60대 중반쯤의 남자가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 그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서초동 법원 옆에 작은 땅이 있는데 화가 나서 못살겠어요. 도시계획이다 뭐다 해서 두부같이 두번을 잘리고 나니까 사다리꼴의 못난이 땅이 됐죠. 게다가 빈 땅으로 놔두면 세금폭탄을 맞는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날림으로 주택까지 하나 지었어요. 팔았으면 좋겠는데 작자가 안 나타나요.”
그 무렵 나는 사무실이 없어서 찾고 있을 때였다. 내가 그걸 사겠다고 했다. 그가 떫떠름한 표정으로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각서를 한 장 추가로 받아야겠어요.”
“무슨 각서죠?”
“날림으로 지은 주택이 무너져 죽으셔도 나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써 주세요.”
정말 엉터리로 지은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존재가 그걸 사라고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각서를 쓰고 땅과 집을 샀다. 나는 미대를 나온 아내에게 소렌토 뒷골목의 우리가 묵은 작은 모텔같이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기초를 보강하고 아름다운 집으로 변형시켰다. 판 사람은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했지만 나는 하늘이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10여년을 잘 살았다. 일층은 사무실로 나머지는 주거용으로 사용했다.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가시고 아이들도 결혼해 집을 떠났다. 나는 사무실을 접고 한적한 바닷가에서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갑자기 그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섰다. 두 시간 만에 그 집을 팔아버렸다. 집이 무너져서 죽지도 않았고 제법 이익이 남았다.
그리고 바닷가 실버타운으로 옮겼다. 담당직원이 자기 마음대로 2년을 계약기간으로 정했다. 일반적으로 3년이나 그 이상이었다. 별 생각없이 직원의 말에 따랐다. 하나님한테 내가 노년에 수행할 장소를 알아서 정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가 통했는지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 몇달전에 식당의 젊은 주인이 자기 집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작위적으로 어떤 일을 꾸미지 않는 편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존재가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이성보다 그 쪽의 지시가 훨씬 정확한 것 같다. 그 존재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 대로 하는 것이
세상을 평안하게 사는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그 존재는 위험이 닥치면 무의식의 내면에서 경고음을 울려주기도 한다. 내년에는 드넓은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시편을 만번 쓰기로 나의 수행을 계속해 보려고 한다.
선생님을 그냥 뵙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