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재벌 회장은 행복할까
대한민국 최고 재벌의 회장을 20여년간 개인비서로 수행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총명하고 자물쇠를 채운 듯 입이 무거운 엘리트였다. 신중하고 빈틈이 없었다. 야망이나 욕심도 스스로 자제할 정도로 인내하는 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회장이 그를 수십년 측근에 두었을 것이다. 그를 만나는 자리에서 호기심에 물어보았다.
“모셨던 회장님의 장점을 얘기해 줄 수 있어?”
그는 잠시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말이 없는 분이었지. 그리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분이었어.”
“삶의 태도는 어땠어?”
“내가 보기에는 은둔형이었어. 회사로 나오지 않고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셨어. 일도 한밤 중에 하셨어. 내가 집으로 가서 명령을 받아 오곤 했지. 내가 집에 가서 보면 엄청나게 많은 다큐멘터리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공부하시더라구.”
“한국의 재벌이 일본의 세계적인 재벌들을 이긴 원동력은 뭐라고 생각해?”
“내 생각으로는 일본 기업들은 금융권의 영향력이 강해. 아무래도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적인 면이 강하지. 그들이 거북이 걸음을 할 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뛴 거야. 오너의 판단과 추진력이 작용해서 앞지른 거지. 우리나라는 박정희라는 사령관이 있었어. 그 사령관을 개발시대의 재벌회장들이 장수 역할을 하면서 세계로 뻗어나가 이렇게 발전했다고 생각해.”
대한민국에서 재벌 회장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드라마에 나오는 것 처럼 수만명의 직원 위에 군림하고 궁전같은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재벌 회장들은 돈을 가져다 바치는 게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이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 이번에는 뇌물공여범으로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는다.
재벌회장들은 청탁을 하고 이권을 얻기 위해서 돈을 스스로 가져다 바치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돈을 뜯기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은밀한 밀월관계일까. 김영삼 정권의 초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뇌물을 받은 죄인으로 법정에 섰다. 그리고 20대 재벌회장들이 역시 뇌물을 준 혐의로 그 자리에 섰다. 나는 방청석에 있었다. 재판장이 피고인이 된 20대 재벌회장들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 중에서 돈세탁을 안하고 청와대에 가져다 준 사람이 있으면 말해보세요. 정당한 돈이라면 왜 세탁을 합니까?”
그 말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대답했다.
“받는 쪽에서 세탁을 안 하면 안 받아요.”
그 말에 재판장이 다시 물었다.
“보통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엄청난 금액인데 영수증 한 쪽 받지 않고 돈을 줬습니까?”
그 말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3공 때는 청와대에서 전화를 해서 돈을 달라고 했어요. 5공 때는 영수증을 주더라구요. 6공 때는 이심전심이예요.”
그 옆에 있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덧붙였다.
“저희가 사업을 하는 것은 돈에 눈이 멀고 욕심만으로 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사업 자체에 열심이다 보면 돈이 따라오는 겁니다. 그런데 돈이 있다고 알려지니까 권력에서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거절할 수 없죠.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환경에 있어 왔습니다.”
그 말에 재판장이 회장들을 향해 물었다.
“알아서 돈을 가져간 겁니까? 아니면 청와대에서 달라던 가요?”
옆에서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걸 의식했는지 이건희 회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 옆에 있던 진로의 장진호 회장이 조용히 손을 들고 이런 말을 했다.
“저희는 피해만 안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재벌회장의 말이 진정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들에게 권력은 피를 빠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물론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재벌 회장은 교도소의 담벽위를 걸어가는 서커스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행복할까.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을까. 삼류의 정치환경을 이기고 세계적인 기업들로 만든 그들의 공로가 작지 않은 것 같다.
money tal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