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돈 잘 쓰는 법
실버타운의 80대 부부가 밥을 먹으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은행에서 우리 돈을 컨설팅해주는 사람이 그러는데 이제부터 돈을 쓰라고 하더라구요.”
그 부부는 일생 개미같이 일만 하고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최소한의 생활비만 사용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받은 월급을 저축해 왔던 것 같다. 그 부부는 자식도 없다.
나의 경우도 비슷한 것 같다. 가난한 시절은 쓸 돈이 없었다. 변호사가 되어 약간의 여유가 생겼을 때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이따금 방송을 보면 굶어 죽는 아프리카 아이들 모습을 보여주면서 돈을 기부하라고 한다. 교회에 가면 라오스에 우물을 파주고 북한을 도와줄 헌금을 하라는 소리를 듣는다. 장학금을 내라는 권유도, 노숙자를 도우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 지갑을 열지 않으면 당장 나쁜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가 땀 흘려 번 돈은 소중하다.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사고 싶은 것도 안 사고 모았다. 선동에 휩쓸리지 않고 한정된 돈을 신중하게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가까이서 돈을 쓰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지켜 보았다.
어느 날 사과 상자가 택배로 집에 왔다. 암으로 죽음을 얼마 앞둔 법무장교 동기생이었다. 죽기 전에 알던 사람들에게 조그만 마음의 선물을 돌린 것이다. “돈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를 배웠다.
오래 전 우연히 전해들은 아는 노인의 얘기다. 지방도시에 살던 그 노인은 열심히 가게를 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는 나이 육십에 가게 문을 닫았다. 그때부터 그 노인은 매일 아침 자기가 50만원 갖고, 아내에게도 50만원을 주었다.
노인은 규칙을 정했다. 그 돈으로 각자 무엇을 해도 좋다. 극장을 가도 되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어도 된다. 그리고 친척이나 거지나 그 누구에게 돈을 줘도 상관이 없다. 다만 저녁에 집에 들어올 때는 돈이 한 푼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었다. 그 부부는 그걸 매일같이 실행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아침, 노인은 신문을 보다가 고목같이 조용히 옆으로 쓰러져 저세상으로 건너갔다. 그 노인에게서 나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운 것 같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노후에는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 가족도, 힘든 형제도, 친척도, 그렇게 동심원을 그리듯 가까이서 부터 보살피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가족이 고통을 받는데 공허한 기부를 하고 신문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단순한 명예욕은 아닐까.
변호사 일을 하다가 의뢰인으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났다. 법정에 정상참작 자료로 그 여인의 선행을 알릴 필요가 있어 그런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그녀는 난감해 하다가 마음의 오지에서 뭔가 발견한 듯 며칠 후 나를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동생을 돌봐야 해서 대학을 가지 못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계천 뒷골목에 있는 작은 회사 경리로 취직했죠. 경리라고 하지만 커피도 타고 청소도 하고 그랬어요. 어느 겨울 아침 출근을 하는데 육교 아래 한 거지 노인이 떨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안됐더라구요. 지갑을 열어서 지폐 한장을 줬어요. 제 점심값이었죠. 마음이 훈훈해졌어요. 그 후에도 텔레비전을 보다가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작은 돈이라도 한 달에 얼마씩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마음이 쓰일 때마다 그랬는데 어디에 얼마를 했는지는 저도 모르죠. 변호사님이 말씀을 하시니까 그럴 때마다 온 영수증들을 한번 찾아볼께요.”
그녀는 혼기를 놓치고 평생 독신이었다. 그 무렵은 중국에서 옷을 사서 중남미에 파는 개인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비닐봉지에 가득 담긴 기부영수증을 내게 가지고 왔다. 둘이서 그 금액을 합산해 보았다. 상상 이상의 거액이었다. 그녀도 자기가 기부한 금액을 보고 놀라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 감동이 왔다. 돈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기부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쓸 걸 쓰지 않고 고통을 받으면서 아껴서 남에게 준 것이다.
거액의 기부자도 훌륭하지만 성경속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닢 같은 돈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돈을 잘 썼는지 못썼는지 내 나름대로 감별하는 방법이 생겼다. 돈을 쓰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고 즐거움을 느껴질 때 그 돈은 잘 쓴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즐거움을 보상으로 주시는 것 같다.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