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맛집 찾는 사람 비난하던 내가 변했다
며칠 전 저녁시간 동해시의 외곽 기차길 옆 작은 중국음식점을 찾아갔다. 서울서 내려온 청년 셰프가 혼자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식당에서 추천하는 찹쌀탕수육과 짜장면을 주문했다. 하얀 찹쌀옷을 입고 잘 튀겨진 고기에 야채가 가득 섞여 있었다. 아삭거리면서 적당한 저항감이 있고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짜장면도 기존의 틀을 벗어난 것 같았다. 양파와 야채를 볶지 않고 채썰고 칼금이 잘게 난 오징어 조각들이 섞여 있었다.
청년셰프가 내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 맛을 칭찬해 주자 아직 여드름 자국이 보이는 청년 셰프가 얼굴이 환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딤섬의 여왕이라는 유명한 셰프에게서 배우고 동해로 내려왔습니다. 지방 분들의 입맛이 보수적이라 아직 딤섬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따금씩 작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새로운 즐거움을 개발했다. 전에는 맛집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시간낭비라고 나무랐었다. 가난하던 시절 음식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배를 채우면 되는 거였다. 군대 훈련시절 식사시간이면 구대장이 3분 이내에 식사를 끝내라고 했다. 그것도 전쟁시 번개같이 배를 채우는 훈련이라고 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나쁜 음식에 익숙해지는 게 수양의 한 방법이라고 인식했었다. 그런 인식이 180도 전환된 것이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수필에서 그는 모든 걸 즐거움을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이게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고 행동한다고 했다. 그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물결이 되어 내 마음 기슭을 건드렸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그걸 비난하던 건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나는 요즈음 많은 즐거움을 발견하고 있다.
해변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면서 파도 소리를 듣고 수평선에서 피어오르는 흰 구름을 본다. 방에 물결처럼 흐르는 바이얼린 연주를 들으면서, 하얀 공책에 시를 쓰면서 깊은 평안함을 느낀다. 가족과의 단란함도, 친구와의 우정도 모르는 독자와의 마음의 교류도, 그 모두가 즐거움이다. 마음이 바뀌니까 주변의 수많은 즐거움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전에는 즐겁지 않고 걱정과 근심을 하며 초조하게 살아왔을까. 젊은 시절 나의 인생관은 노력해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남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어떤 지위에 가 있어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했다. 정상에 꽂힌 성공이라는 깃발만 보이고, 가는 길 옆에 피었던 작은 들꽃이나 푸른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파란 하늘에 흐르는 하얀 구름은 보이지 않았었다.
너무 지나치게 어떤 목적을 설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생에 그렇게 꼭 목적이나 의의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며 살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인생은 즐기려고 태어난 것이지 그것 이외에 무슨 다른 목적이 있어야 했을까.
살아보니까 인생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즐겁기 위해 사는 게 맞을 것 같다.
종교적인 고정관념이나 회의도 나 자신을 묶는 멍에가 된 것 같다.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외국인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본향인 천국으로 가야하는 나그네였다.
불경을 봐도 인생은 고해라고 하면서 참고 건너가야 했다. 험한 세상을 건너가 다른 세계로 가는 게 구원이라는 인식이었다. 교회를 가면 구원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삶의 즐거움은 그다지 말하지 않았다. 거기서 제시하는 천국도 막연했다.
인간은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셋째 하늘에 갔다 온 사도 바울처럼 묘사가 불가능해서일까. 단테의 <신곡>을 읽어봤다. 지옥과 연옥은 아주 생생하게 묘사됐는데 천국은 안개 낀 듯 아주 희미하다. 그에 비해 마호메트는 아주 구체적이다. 파란 풀과 맑은 물이 흐르고, 늙은이는 다시 젊어지고 미인들이 시중을 드는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예수는 우리를 멍에와 굴레에서 자유 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는 3차원에 머무는 것만은 아닐 것 같다. 셋째 하늘인 낙원과 지옥은 내 마음속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평안하고 감사한 인생, 그게 낙원이고 천국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