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가난에서 오는 옹졸함 혹은 자격지심?
아흔살의 노인의사는 평생 가슴에 맺혔던 얘기를 했다. 그가 수련의 시절은 보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난한 그가 교수댁에 인사를 가려는 데 차마 빈 손으로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생각 끝에 그는 시외에 있는 과수원을 찾아가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아홉개 싸게 샀다. 그는 과수원의 구석에 있는 대나무 가지로 광주리를 엮어 사과를 넣은 후 교수댁에 가지고 갔다.
며칠 후 그가 일 때문에 다시 그 교수댁에 갔다. 마루 끝에 그가 가지고 간 사과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교수 부인이 누가 저런 선물을 가져왔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차더라는 것이다. 그의 가슴에 깊은 상처가 났다. 내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상처가 평생 갔다고 고백했다.
사람마다 그렇게 마음에 매듭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나도 그런 경험들이 있다. 대학입시 무렵 학교 앞 가게에서 국산 포도주를 사서 포장해 아는 선생님에게 선물했다. 그 얼마 후 선생님은 지나치는 소리로 양주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고등학생인 나는 양주를 살 돈이 없었다. 어머니가 전해주라는 선물도 아니었다. 그냥 소년의 순박한 마음이었다.
대학 졸업 무렵 장학금을 주는 재단의 신세를 졌었다. 나는 그 재단을 관리하는 교수의 배려로 돈을 받게 됐다. 추석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고마운 교수님한테 가져다 드리라고 하면서 송편이 든 양철 찬합을 주었다. 송편이 솔잎과 함께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솔직히 말하면 음식 만드는 솜씨가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좋은 음식들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송편을 들고 한시간반 가량 시내버스를 타고 그 교수님이 사는 동네로 갔다.
교수님 집은 2층 양옥집이었다. 넓은 마당에 잔디가 자라고 있었다. 우리 집과는 비교가 안 되는 부자였다. 교수님은 대지주의 아들이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 그는 일본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교수가 되어 학자로 명성이 높던 분이다. 그 교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랑같이 얘기한 적이 있다. 소학교에 다닐 때 점심시간이면 집에서 머슴들이 교자상을 차려 가지고 학교까지 가져 왔다고 했다. 그 교수는 총명한 머리와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금수저 중의 금수저 같았다.
해인사 암자에서 공부할 때였다. 그 교수가 절 아래의 고급 여관으로 왔다. 돈을 얻어쓰는 장학생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 교수가 묵는 방으로 찾아갔다. 교수는 자개밥상 위에 놓인 밥을 먹고 있었다. 당시는 호텔에서 그렇게 상을 차려 손님방으로 내왔다. 상 위에는 하얀 쌀밥과 국, 구운 생선, 명란젓, 김이 놓여 있었다.
장학재단에서 암자에 내는 하숙비로 얻어먹는 밥은 밀쌀을 삶은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그런 인공의 쌀이 있었다. 겨우내 암자 처마에 걸려 있던 시래기에 된장을 조금 푼 국이었다. 양념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허연 김치가 있었고, 베니어로 만든 길다란 상의 표면에는 얼음이 얼어 동치미 그릇이 미끄럼을 타고 다녔다. 교수님의 밥상을 보면서 입에 침이 고였다. 나도 언젠가는 성공해서 그 여관으로 와서 저런 밥상을 받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교수의 집 넓은 잔디마당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고풍스러운 병풍이 서 있고 그 앞에 보료가 깔려있었다. 교수님은 영화에서 보는 대감님 같았다. 저절로 절을 하게 됐다. 나는 주저하다가 어머니가 드리라고 했다면서 초라한 양철 찬합을 앞에 내놓았다. 교수님이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교수님의 눈길이 묘하다는 걸 순간 느꼈다. 그 눈빛은 어머니의 송편들을 멀리 밀어내는 것 같았다.
교수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한마디 덕담을 해 준 기억도 없다. 신세를 졌고 고맙다고 생각하는 데 그 떨떠름한 눈길이 평생 잊혀지지 않았다.
부자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의 초라한 선물에 담긴 감사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고 내게 장학금을 배려한 그 교수님도 영원한 침묵의 세계로 옮겨간 지 오래다.
의식의 깊은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그런 기억의 단편들은 무엇일까.?
수련의 시절 과수원 바닥에 떨어진 사과들을 광주리에 담아갔던 아흔살 의사 노인은 자기도 의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병원장을 지냈다고 했다. 나중에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니까 이해가 되고, 마음의 매듭들이 풀려버리더라고 했다.
나도 그랬다. 감정에 솔직한 교수의 눈길이 납득이 갔다.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이상적인 성인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자개밥상 위의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에 남아있던 해인사 아래의 전통한옥 고급 여관을 찾아가 보았다.
그냥 보통의 여관이었고 보통의 음식이었다. 내가 가졌던 소망이 너무 시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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