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어리석은 판사, 고마운 판사
요즈음 ‘동네 변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주변의 소소한 일들을 맡아 직접 처리한다. 사무실도 직원도 없다. 칠십 노인이 직접 모든 일을 한다. 그는 법원장이었다. 대형 로펌 대표도 했었다. 그가 ‘동네 변호사’가 된 건 노년의 겸손과 봉사의 모습이었다. 서울에 올라간 길에 그를 만났더니 대뜸 이런 하소연을 했다.
“어쩌다 법정에 나가 봤더니 젊은 판사의 태도가 가관인 거야. 사람들에게 온통 호통을 치고, 변호사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천방지축인 거야. 내 경력을 대충 눈치챘을 텐데 나한테도 그러더라구.”
그도 임자를 만나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사라는 목적을 성취하면 그런 식으로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걸 견뎌내야 변호사가 둥글둥글해지고 익어간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알려지고 일찍 판사가 된 사람들 중에는 더러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남에게 상처 주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걸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런 버릇을 고치기가 쉽지 않다. 내면이 성숙하지 못해 하는 그런 행동을 딱 꼬집어 교만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나도 그런 성격을 가진 판사를 만나 수모를 당한 적이 있다. 변론서의 문장 때문이었다. 나는 법조사회에서 전해내려 오는 판에 박은 문장들이 싫었다. 어려운 한자어에, 정서도, 생명력도, 철학도 들어있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를 봐도 그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 언론인 생활을 한 선배가 한글로 된 판결문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내게 해석을 부탁한 적도 있다. 논설위원을 지낸 그는 문장이라면 대가급이었다.
차라리 단편소설 같은 영어로 된 미국의 판결문을 읽으라면 사람들이 더 빨리 이해할 것 같았다. 내가 만드는 변론서만이라도 문장들을 나의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보통사람들이면 누구나 한편의 쉬운 에세이를 읽듯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글을 풀어서 썼다. 기존의 전형적인 법률문서의 문투를 깨어버렸다고 할까.
물론 법리를 거푸집으로 했다. 법의 핵심을 소설의 주제같이 너무 튀어나오게 하지 않고 사실 속에 녹였다. 주제를 너무 강조하면 철근이 흉칙하게 드러난 건축물 같기 때문이었다.
한 형사 법정에서였다. 변호사들을 괴롭히기로 소문난 판사가 재판장이었다. 그와 같은 방에서 판사로 일하다가 나와 변호사가 된 사람이 분노하는 걸 봤다. 어제까지도 동료로 같이 점심을 먹곤 하던 사람이 법정에서 그렇게 모멸감을 주더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앉은 채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쓴 변론서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말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법률문서 맞습니까?”
그가 이번에는 방청석을 향해 시선을 던지면서 소리쳤다.
“이 변호사한테 사건을 맡긴 의뢰인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봐요.”
그 말에 나의 의뢰인이 겁먹은 얼굴로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섰다. 재판장이 그에게 말했다.
“이 변론서를 보니까 말이요. 당신이 직접 써도 되겠어. 이런 변론서라면 돈을 주고 변호사를 선임할 필요가 없을 거요.”
그 사건의 결정권을 쥔 재판장의 말 한마디는 나의 밥줄을 끊어놓았다. 요즈음 말로 나는 폭망했다.
그런 종류의 판사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무렵 북부지법에서 열린 어린아이 유괴범의 변론을 맡았었다. 시사프로그램에도 그 내막이 방영되면서 그 범인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어차피 중형이 예상되는 사건이었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 변론서 안에 한편의 중편소설을 썼다. 원고지 200장 정도의 분량에 유괴범의 고달픈 삶과 범죄 현장에서의 긴장감이나 아이들과의 관계들을 밀도있게 묘사하려고 애썼다.
특히 마지막까지 칭얼거리는 일곱살 짜리 여자아이 두명의 생명을 존중했던 유괴범의 내면을 강조했다. 재판장은 그 유괴범을 집행유예로 석방하면서, 그에게 담당변호사한테 감사하라고까지 말해 주었다.
그 재판장은 내게 “정말 변론서를 잘 쓰셨다”고 칭찬해 주었다. 판사들이 변호사를 통해 반대편의 리얼한 진실을 알아야 바른 판단이 나온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의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법률문서만으로는 진실이 파악될 수 없다고 했다. 그 판사가 고마웠다.
세월이 흐르고 2년 전 초겨울 저녁 무렵이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의 한 커피숍에서 친구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때 창가에 낡은 점퍼를 입은 초라한 남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법정에서 나를 모욕하면서 밥줄을 끊어놓았던 판사였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그는 승승장구해서 대법관이 됐었다. 나와 대화를 하던 친구가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가 암에 걸려 외국에 가서 수술을 하기 위해 대기중이라고 했다. 그는 어두운 창밖의 허공에 뜬 달을 무심히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예전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도 차면 기울기 마련이다. 영원히 남보다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고, 평생 동안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죽어지내는 사람도 없는 게 세상의 섭리다.
인간이란 어떤 자리에 있든 물처럼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그게 겸손이다. 그래도 약해 보이는 물 한 방울에 진리가 숨어있다. 한 방울 한 방울 조용히 떨어지는 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 나는 바위같이 단단한 세상을 향해 매일 물방울 같은 글한편씩을 쓰고 있는 기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