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은혜와 감동
사무엘상 26장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삼상 26:2)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다윗을 죽이겠다고 삼천 명을 거느리고 나선 일 말입니다. 지난 번에 사울은 다윗에게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자신을 살려준 다윗이 고마웠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시 다윗을 죽이겠다며 나선 것입니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감동을 경험하면 삶이 완전히 뒤바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바다 사이를 걸어서 이집트를 탈출하는 순간이 얼마나 감동적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감동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 순간에는 뭐라도 당장 큰 변화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감동은 지속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감동은 반드시 식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았던 감동은 광야의 뙤약볕에 증발해 버렸습니다. 사울이 느꼈던 감동은 이글거리는 열등감에 촛농처럼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감동적인 예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감동적인 설교도 많습니다. 감동적인 집회 또한 많습니다. 그런데 감동 때문에 사람이 변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감동을 마음 한가득 품고 나오다가 주차장에서 발생한 조그만 마찰에 감동을 잃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잡칠 수 있는 것이 감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은혜가 감동을 수반하지만 감동받은 것이 곧 은혜받은 것은 아닙니다. 감동이 마사지(massage)라면 은혜는 메시지(message)입니다. 은혜의 이면에는 반드시 진리가 있습니다(요 1:14). 진리의 칼날은 우리의 폐부를 후벼파고 영혼에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감동에는 피가 없지만, 은혜에는 피흘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그저 감동으로만 받는 것이 오늘날의 시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은혜를 감동으로만 받으면 더 큰 감동을 갈망하게 됩니다. 감동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자리를 찾아다니게 됩니다. 은혜입은 성도가 아니라 감동의 소비자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진짜 은혜를 알면 감동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감동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으면 발버둥이 시작됩니다. 변화에 대한 의지가 생기고 매일의 끈질긴 혈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삶은 해안선과도 같습니다. 여름 한철의 태풍에 해안선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해안선을 바꿔놓는 것은 매일 끈질기게 철썩거리는 파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