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부모와 자식의 관계
사무엘하 14장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삼하 14:21)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어디까지 악화될 수 있을까요? 압살롬은 다윗에게 반역의 칼을 빼들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도망가지 않고 버텼다면 다윗은 압살롬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셈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부자지간에 묘하게 끼어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압입니다. 그는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알았고, 압살롬이 다시 궁으로 복귀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재회를 주선합니다. 다윗과 압살롬이 얼굴을 안보고 지낸지 3년 만이었습니다.
재회하기로 약속한 당일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삼하 14:24) 다윗이 아들 얼굴을 보기 싫다고 한 것입니다. 얼굴 보자고 먼저 연락해놓고 당일에 얼굴을 돌려버리는 아버지를 압살롬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러버립니다. 압살롬이 받은 거절감은 어땠을까요?
이후에 다시 한번 요압이 나섭니다. 그제서야 아들과 아버지는 얼굴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화해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마지못한 형식적 입맞춤으로 재회의 자리는 끝나버리고 결국 압살롬의 반역이 시작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화해한다는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이 그리운 동시에 아들이 미운 아버지의 어지러운 속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용서와 화해는 연봉 협상하듯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계약사항을 이행하듯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형들이 화해하는데 20년이 걸렸고 에서와 야곱도 화해하기까지 장장 20년이 걸렸는데 요압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윗과 압살롬의 화해를 섣불리 주선했을까요? 용서와 화해는 사람의 계산과 계책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 다루었다가 걷잡을 수 없이 덧나고 마는 것이 미움입니다.
예수님은 화해를 위해 목숨값을 대가로 지불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그만큼 값비싼 것입니다. 값싼 화해를 성사시키려고 요압이 얄팍한 꾀를 내지만 않았어도 압살롬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부자지간의 연이 끝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