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사무엘하 22장
설명이 어렵지만 노력하면 설명이 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물리적 세계입니다. 과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점점 물리적 실체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과학은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설명할 수 있어도 설명하지 않는 편이 도리어 유익한 것도 있습니다. 예술의 세계입니다. 설명이 너무 많아지면 그건 예술이 아닙니다. 작품에 대한 설명 한마디 없이도 전율하고 감탄하며 흥분할 수 있는 세계가 예술의 세계입니다.
한편으로 설명하고 싶은데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가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불필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신비입니다. 2,000년 전에 기록된 고대 문서가 어떻게 오늘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 믿고 싶어도 못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는데 근거와 논리와 설명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저 거들 뿐입니다. 설명이 우리를 신앙의 근처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설명이 믿음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설명이 많아지고 길어질수록 내가 설명하려는 믿음의 본질이 퇴색되기도 합니다. 만약 설명과 논리로 복음이 완벽하게 전해지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십자가가 아니라 책상 앞으로 이끄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더 많은 변증, 더 많은 설명, 더 많은 설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노래가 필요합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이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노래입니다. 음악적 형식을 갖추어야만 노래가 아닙니다. 노래란 툭 하고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노래입니다.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의 노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삼하 22:2) 다윗은 하나님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변호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그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했기에 노래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