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내 꺼야” vs “아니야 내 꺼야”
열왕기상 2장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왕상 2:15)
아도니야의 말인즉슨 왕위는 원래 자기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윗의 아들 서열 상으로 보면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이 맞고, 실제로 사람들은 아도니야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애시당초 아도니야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처럼 아도니야는 김칫국을 미리 배부르게 들이킨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아도니야는 밧세바를 찾아가서 수넴 여인 아비삭을 달라는 청을 올립니다. 수넴 여인 아비삭은 아버지 다윗이 노년에 들인 첩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첩을 요구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자리를 요구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비록 왕위는 솔로몬에게 빼앗겼지만 그 비슷한 것이라도 손에 쥐고 말겠다는 집념이 아도니야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엔 아버지의 첩을 요구한 대가로 처형당하고 맙니다.
소유의 문제는 단순히 소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입니다. 내 것이라 주장할 것이 있고, 내 것이라고 생각도 하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소유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파국을 맞고 만 것입니다.
소유권 문제는 세상 모든 갈등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다섯 살 먹은 아이들의 다툼은 단 두 마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꺼야”, “아니야 내 꺼야” 이 두 마디의 테마가 발전된 것이 어른들의 다툼입니다. 어른이 되면 ‘내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와 레퍼런스, 논리, 정당성의 부여가 다양해지고 복잡해질 뿐입니다.
사람들은 왜 소유에 집착할까요? 소유가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소유가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 줄 것라는 기대감이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의 세상 아닙니까?
세상은 소유와 자유를 동일시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성경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소유에 대한 집착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선물합니다. ‘네가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는가?’라고 질문하는 곳이 세상이라면 ‘네가 누구의 소유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서 ‘나를 가진 분’으로 관심의 초점이 이동할 때 경험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