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이런 고부관계…나오미와 룻의 경우
룻기 1장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룻이 한 말은 ‘나는 유대인과 형제 자매가 될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도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이 말을 직접 들었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누구 맘대로?”라고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모압 상것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은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돌아가라고 강권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따라온 며느리가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시어머니는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룻이 시어머니를 보니까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는 게 가능해 보였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에 대해 소문으로 들어는 봤지만 직접 경험해본 유대인 시어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은 자기같은 천한 이방인 과부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전도란 이렇게 하는 것 아닐까요?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지만, 세상은 크리스천을 읽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삶에서 하나님을 읽었습니다. 나오미의 손에서 하나님의 손을 느꼈고, 나오미의 진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 1:20)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고난과 가난에 쩌든 자기 인생이 쓰디쓸 뿐이었지만, 적어도 룻에게 나오미는 여전히 ‘나오미’였습니다. 내 인생의 맛이 내게는 쓰더라도 누군가에게 ‘나오미’일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요?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사회적으로 잘 나가고, 남부러운 인생을 살아야만 나를 통해 하나님이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입은 사람도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눈물이 누군가에게는 웃음보다 더 진한 위로일 수 있고, 미생의 몸부림이 완생보다 더 깊은 울림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