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올리비아 핫세도 73세로 하늘로..노인들의 마지막 소망은?

<로미오와 쥴리엣>의 올리비아 핫세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에게 들은 이런 얘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평창동에서 손님을 태웠죠. 뚱뚱한 데 덩치가 크고 튼튼해 보였어요.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부인에게 전화를 걸고 나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몇 번 치더라구요. 잠시 후 창문쪽으로 고개를 떨어 뜨리더라구요. 등산하고 내려와서 잠이 든 줄 알았죠. 수유역까지 가서 내리시라고 했더니 가만있는 거예요. 몸을 흔들어도 마찬가지였어요. 죽어 있었어요. 너무 놀라고 무서웠죠. 50대 은행지점장이라고 하더라구요. 사람이 그렇게 끝나는지 몰랐어요.”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죽을 수도 있었다. 그가 부인과 마지막 통화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죽음은 행복한 것이었을까.

지난 2년간 실버타운에서 살면서 갑작스런 죽음을 보기도 했다. 한 노인은 내게 남는 게 시간밖에 없다고 하면서 삶이 지겹다고 했다. 그 노인이 며칠 후 실버타운 내 PC방 바닥에 죽어 있는 것을 직원이 발견했다. 저녁을 잘 먹은 노인이 새벽 1시쯤 시신이 되어 몰래 실려 나간 경우도 있었다. 실버타운 노인들은 그런 종류의 죽음을 부러워했다.

실버타운에서 오래 근무한 50대말쯤의 직원이 노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어르신들 가급적이면 요양병원에 가지 마세요. 생명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고생해야 죽어져요. 요양병원에 가시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해골같은 상황이 돼도 죽지 못하게 합니다. 다시 건강해질 수 없는 숨만 붙어 있는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채로 인공호흡기를 꽂고 있다가 죽는 거예요. 병상에 누운 채 남은 인생을 내팽개치지 마시고 하루라도 잘 사세요.”

겉으로는 낙원같이 보이는 실버타운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환자들로 차 있다. 노화라는 병은 낫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더 나빠지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실버타운에서 지각이 있는 노인들은 죽음을 미리 생각하면서 그 방법을 서로 의논하기도 했다. 한번은 실버타운 로비에서 몇몇 노인이 얘기하는 걸 들었다.

70대 후반의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서울법대 출신 동창 모임에 가면 어떻게 고통 없이 편하게 죽을까라는 얘기들이 많이 나와요.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를 하겠다는 친구도 있고 아편 한 덩어리를 먹으면 된다는 사람도 있죠. 그걸 구하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다고 그래요. 어차피 죽을 거지만 그 방법이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의사에게 끌려다니지 말고 우리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노인은 젊은 시절 잘 나가던 미남 검사였다. 죽음이 가까운 노년에는 학벌이나 지위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 다음으로 평생 여객기 기장을 했다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실버타운에서는 고참인데요. 저는 제 옆방 노인이 목을 맬 로프를 준비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올가미 끝이 미끄러져서 풀어질까 봐 그 부분만 따로 실로 꼼꼼하게 감아 매듭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그렇게 쓸쓸하게 죽고 싶지는 않아요. 다시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손주를 학교에서 데리고 오고 싶기도 하구요. 아직 기운이 남아있을 때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요.”

한 노인은 이런 말을 했다.
“포구 옆 해변에서 빨간 무인 등대가 있는 곳까지는 물의 깊이가 가슴 정도까지예요. 걸어갈 수 있죠. 그러다 등대를 넘어서면 바다 밑의 절벽이 나타나요. 물밑으로 강한 조류가 흐르고 너울성 파도가 이는 곳이죠. 거기까지만 가면 종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어요. 갈치가 화장장보다 시신을 더 잘 처리해 준답니다. 겨울 바다는 추우니까 따뜻할 때 바다로 들어가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현명한 노인들은 삶의 결승점이 죽음이라는 걸 안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세상의 근심을 없애주고 무엇을 우선순위로 할 지를 알려준다고 했다. 삶에서 남는 건 기억이고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기억뿐인 것 같다고 했다.

2024년이 이제 사흘 남았다. 일흔 세 살의 미국 여배우 올리비아 핫세가 가족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조용히 무의식의 세계로 건너갔다는 저녁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소년 시절 우리들의 영혼을 뒤흔들었던 영화 속의 쥴리엣이었다. 영화 속의 쥴리엣 같이 독을 먹고 죽지 않고 현실의 올리비아 핫세 같이 눈을 감는 게 노인들의 마지막 소망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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