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합격자 발표

‘그 순간’ 위해 쏟은 정성 어찌 헤아릴까

<그림=박은정>

3월 신주쿠에서의 오전

약속이 갑자기 오후로 미루어지는 바람에 나만의 한적한 시간을 가졌다. 아무 계획 없이 호텔방을 나와서 마냥 걷기 시작했다. 도쿄의 중심지 신주쿠의 오전은 의외로 조용하다. 3월이라지만 아직은 바람이 차다.

마치 도쿄를 처음 찾은 여행객처럼 카메라를 들고 빌딩숲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며 다녔다. 반듯반듯한 건물, 깨끗한 거리, 세련된 정장차림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인다. 나는 시골쥐 서울 온 양 어리둥절 걷다가 다른 하나의 공간을 만났다. 신주쿠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것 같지 않은데 커다란 공원이 펼쳐진다. 58ha나 된다는 신주쿠교엔(新宿御苑)이다.

황실의 정원이었지만 전후 국민공원으로 개방되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으로 4월에는 내각총리 주최의 ‘벚꽃놀이 모임’이, 11월에는 환경대신 주최 ‘국화 즐기는 모임’이 열린다는 바로 그 곳이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도 없다.

그런데 어디선가 떠들썩하다. 소리 나는 쪽으로 발을 돌렸다. 신주쿠교엔 끝자락에 위치한 고등학교 뒷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만세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면서 깡충깡충 뛰는 모습도 보인다. 오늘이 마침 도쿄도립 신주쿠고등학교 합격자 발표날이란다. 임시로 마련한 게시판에 수험번호를 나열한 하얀 대자보가 3장 붙여져 있다. 그 앞에서 아웅다웅 번호를 확인하고 핸드폰 카메라에 담는다.

30년 전, 나는 가나가와현립 가와사키키타(神奈川?立川崎北)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발표 날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었다. 그리고 게시판의 수험번호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확인했으며, 함께 간 친구들과 축하한다면서 껴안고 울고 웃던 기억이 있다. 그 때 그 모습이 21세기의 도쿄 한복판 신주쿠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공중전화 앞에 긴 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 하나 다르다.

도쿄대학 합격 발표하는 날

일본은 참 재미난 나라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모습이 있다는 건 바꾸지 않기 때문인지, 바뀌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키려고 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합격 발표 같은 건 이제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시대다.

발표날 살짝 컴퓨터를 켜고 학교에 접속한 다음 자신의 수험번호를 넣는다. ‘축하합니다’는 글을 확인하고 이제야 “엄마 아빠 나 합격이야. 합격했어”라면서 큰소리를 지르고 거실바닥을 뒹굴면서 좋아한다. 그런가 하면 ‘불합격입니다’라는 차가운 글을 보고 조용히 전원을 끄고 혼자서 기다란 숨을 내쉰다.

물론 일본도 지금은 인터넷상 합격자의 명단을 게시한다. 그래도 그들의 합격발표는 마치 하나의 세리머니와 같다. 도쿄대학은 매년 3월10일에 합격자 발표를 한다. 정오 무렵 캠퍼스 도서관 앞에 합격생 수험번호가 적힌 게시판이 게시되는데, 그 전에 럭비부와 미식축구부 학생들이 바리게이트를 친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게시판을 실은 2대의 트럭이 마치 모세의 기적과 같은 길을 만들면서 바리게이트를 뚫고 들어가서 게시판을 고정하고 떠나면 무대는 완벽하게 완성된다. 운동 경기 전 옐을 교환하는 것 같은 응원의 고함소리를 올리고 바리게이트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무너지고 수험생들은 자신의 번호를 확인하기 위해서 게시판 앞으로 달려든다.

“합격이다” “감사합니다” 등등의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서 헹가래치는 모습이 보인다. 운동부 선배들이 여럿 달려와서 합격의 기쁨을 헹가래치는 것으로 함께한다. 축제와 같다. 아니, 바로 축제다. 헹가래에 어울리는 복장이다. 물론 합격자들 사이로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 이의 얼굴도 비친다.

바리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헹가래치는 모습을 보기까지 2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길이를 어찌 알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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