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손가락 걸고 약속

<그림=박은정>

손가락 걸고 약속

딸아이는 이번에 성적이 오르면 갖고 싶은 게 있다고 아빠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핀잔을 주지만, 아빠는 별도 달도 따주겠다고 한다. 활짝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약속을 하잖다. 아빠의 투박한 손가락에 실처럼 가늘고 하얀 딸아이의 손가락이 감는다.

“아빠, 도장도 찍어야지”라면서 새끼손가락을 건 채 엄지를 내밀고 꾹 누른다. 손등을 서로 맞대어 쭉 밀면서 ‘복사’도 하고, 손바닥을 맞대어 밀면서 ‘코팅’까지 해야 한단다. “우리 공주 똑똑하기도 하지”라고 마냥 좋아하는 ‘딸바보 아빠’는 이런 요상한 의식을 끝까지 따라한다.

하기야, 언제 이런 행동 해봤겠는가?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는 해봤을까…?

일본의 유비키리 겐만

그나저나 요즘 애들은 약속도 별나다. 새끼손가락 걸고 끝나는 게 아니라 사인이니 복사니 그 절차 하나 요란하다. 옆에서 중얼중얼했더니 일본에서는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일본도 약속을 할 때는 새끼손가락을 건다. 이것을 ‘유비키리 겐만’이라고 하는데, 새끼손가락을 걸고 위아래로 흔들면서 가벼운 리듬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노래를 마침과 동시에 손가락을 빠르게 뗀다.

유비키리 겐만 / 우소 쓰이타라 / 하리 센본 노마스 / 유비 킷타♬
指きり拳万 / ?ついたら / 針千本?ます / 指きった

아이들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겠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겠다’ 약속하면서 참새 같은 작은 입으로 노래를 부른다. 마치 동요를 부르듯.

손가락을 자른다고…?

그런데 이 노래를 듣고 내용을 살피면서 다들 놀란다. 사실 나도 놀랐다. 이렇게 무서운 내용이었는지 몰랐었다. ‘유비키리(指切り)’란 손가락을 자른다는 뜻이다. 그것도 모자라 ‘겐만(拳万)’은 주먹으로 만 번 때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면 바늘 천개를 삼키게 한다’는 내용의 가사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번도 이 노래 가사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마치 주문 외듯 아무 생각 없이 리듬을 타고 소리 내어 불렀다. 일본 친구들도 그랬던 것 같다. 엄마는 천사 같이,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약속을 한다.

‘설마’하는 마음에 사전을 찾았지만 ‘역시’ 그렇다. 그 유래도 만만찮다. 에도시대 유곽의 유녀가 남자에게 사랑을 맹세할 때 왼쪽 새끼손가락을 잘라서 보낸 것에서 비롯되었단다. 이른바 맹세 혹은 애정의 표시였다. 이것이 서민들에게 전해지고 어린아이들이 흉내 내면서 ‘유비키리 겐만’이 만들어졌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어찌되었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혼난다는 사실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고르바초프도 유비키리 겐만

새끼손가락을 걸고 사이좋게 잘~ 지내자고 약속하는 것은 아이들만의 행위는 아닌 것 같다. 다 큰 어른들, 그것도 점잖은 사람들이 이런 행위를 해서 주목을 끄는 일도 간혹 있다.

오래전 일이기는 한데, 1991년 4월 일본을 방문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총리와 수뇌회담을 진행하고 ‘일소공동성명’에 서명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유비키리 겐만’을 하는 사진이 신문을 장식했다. 두 사람 모두 1931년생이니, 당시 예순을 맞이한 두 어른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은 재미났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은 마냥 즐거워하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북방영토는 2차대전 전승국으로 얻은 것이므로 영토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구소련이 처음으로 ‘영토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최초의 교섭이었다. 그러나 실질적 진전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게 후담이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개혁을 위한 경제협력을 요구했고 이거 역시 별 성과는 없었다.

2005년도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문희상 의원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신뢰의 정치를 하자’면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는 사진 역시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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