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우동 한 그릇
아이들 책을 정리하다가 <우동 한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읽은 적이 있는데, 분명 원제는 <잇파이노 가켓소바(一杯のかけそば, 한 그릇의 메밀국수)>로 기억한다. 역자는 ‘메밀국수’를 왜 ‘우동’이라고 했을까, 이런 작은 의문을 가지면서 손을 잠시 쉬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아는 내용이고,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는 것도 아는 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활자 어딘가에 최루 가루가 뿌려져 있는 게 분명하다. 두 세 페이지를 넘기자 눈물이 앞을 가긴다. 그러고 보니, 80년대 말 일본어로 된 이 책을 읽었을 때도 훌쩍훌쩍 거린 기억이 난다. 그때는 20대 순수 그 자체였으니 그렇다 치고, 씩씩한 아줌마의 눈물샘도 예외 없이 적히는 것을 보니 역시 만만찮은 작품이다.
<우동 한 그릇>은 구리 료헤이(栗良平, 1954~)의 단편소설이다. 큼직한 글씨에 각 페이지마다 삽화를 넣고도 채 50페이지가 되지 않는 짧은 글이다. 이 글이 일본 전국민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89년 국회에서 오쿠보 나오히코(大久保直彦) 의원이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수상 앞에서 리쿠르트 사건과 관련된 질문을 하는 가운데 이 책을 낭독한 후의 일이다.
리쿠르트 사건이란 주요 정치가와 관료가 연루된 증수회 사건으로 당대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이다. 오쿠보는 이 책을 낭독하고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서민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 사건으로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킨 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중요한 사실은 엄숙한 가운데 거의 전문을 낭독했다는 점이고, 이것을 들은 대다수의 의원들이 눈물을 훔쳤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작품이 세상에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88년 섣달그믐날 라디오에서 낭독되었고, 각종 신문에서 다룬 적도 있었다. 그래도 국회에서의 낭독을 계기로 붐이 일어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야기에 감동한 유지들은 각종 모임을 결성했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내용은 간단하다. 섣달그믐날 우동 한 그릇을 시켜서 나누어먹는 가난한 세 모자의 이야기다. 어렵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훌륭하게 성장한 두 아들과 어머니가 훗날 다시 우동집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도시코시소바
섣달그믐날 우동을 먹는다는 설정은 작가 한사람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일본에는 섣달그믐날 밤에 메밀국수를 먹는 풍습이 있다. 해를 넘기면서 먹는 메밀국수라 ‘도시코시 소바(年越しそば)’라고 한다. 에도시대에 정착된 것인데 지금도 60%에 가까운 사람들이 도시코시 소바를 먹는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가늘고 긴 국수 가락처럼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한 메밀이 잘 끊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는 해의 온갖 나쁜 것들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하고픈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금은세공사가 흩어진 금가루를 모을 때 메밀반죽을 이용하기 때문이란다. 메밀은 물에 잘 녹기 때문에 메밀반죽으로 금가루를 꽉꽉 눌러서 금가루를 모으고 물에 넣으면 금가루만 바닥에 가라앉는다. 그러니 ‘금을 모으다=돈을 모으다=부자가 되다’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다.
뒷이야기
이 소설이 붐의 절정에 이르자 매스컴은 ‘실화니 아니니’만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일본의 대표적 생방송 버라이어티 토크프로그램 ‘와랏테 이이토모(笑っていいとも, 웃어도 좋아)’의 사회자 모리타 가즈요시(森田一義)다.
그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70년대, 우동 값 150엔이면 인스턴트 메밀국수 3개는 살 돈이다”고 지적했고 “눈물의 파시즘!”이라고 비판했다. 선글라스 속 희극배우의 눈은 정확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낮 12시에 어김없이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이 30년이나 이어져 지금도 방영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모르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작가 료헤이는 북해도 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는 사실이 거짓으로 발각되고, 여러 사기사건과 연루된 다음 모습을 감추었다. 여하튼 이후 <우동 한 그릇>의 신드롬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래도 서재 한구석에서 다시 읽은 <우동 한 그릇>은 역시 감동이었다. 버려야 할 책들을 한가득 쌓아두고 어려웠던 지난 시절의 추억에 잠시 가슴이 촉촉해졌다. 작가가 학력위조를 했다거나 사기꾼이라거나 이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메밀국수를 왜 우동이라고 했을까, 이런 것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시 읽어도 눈가를 촉촉이 젖히는 감동은 그런 것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이 책에는 분명 희석되지 않는 체루 가루가 활자 속에 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