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의 렌즈 판소리]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의 본 뜻은?
스승이 중요하다. 선생은 인생의 선험적 경험을 바탕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진리적 가치 기준을 양심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후학들에게 자신의 예술 재주와 견해를 넘어 새로운 경지의 예술세계로 진일보하도록 해줄 수있는 관대하고 고매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하지 않던가. 첫 내딛은 걸음마로 평생을 가는 것이다. 스승을 잘못 만나면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린다. 예술 인생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스승의 도량과 아량이 널직해야 청어람의 제자가 나오게 되여있다. 공자는 가르칠 때 제자의 인격과 재주와 능력에 알맞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것이 인재시교(因材施教)다. 둔마(鈍馬)와 준마(駿馬)의 고삐 다룸이 달라야 제각각 타고난 제걸음으로 달릴 수 있는데, 천편일률의 방식을 적용하는 교육 방식으로는 오히려 본성을 해치기만 한다.
언젠가 성우향 스승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옛날 우리 어려서 소리 배울 때 보면, 소리 배울 대목을 선생한테 배우기 전에 학생이 먼저 창조로 소리를 입혀오라고 했어야.”
이 말에는 많은 것을 담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설프겠지만 소리 가사에 담긴 뜻과 감정을 자신의 순수한 예술 영감으로 각색하도록 유도한 가르침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옛 사람들은 이렇게 첫 걸음마도 스스로 내딛게 했던 것이다. 나의 스승 강도근 선생님께서는 어떤 대목을 세가지 버전으로 가르쳐 주실 때가 있었다.
나는 스승께 물었다. “선생님 어찌해서 똑같은 대목을 이렇게 다르게 가르쳐 주신지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아, 이런 멍청이가 없네잉. 그중에서 제일 좋은 놈으로 골라서 부르면 될 것 아니여! 그건 아무것도 아니여. 그렇게 배운 놈을 가지고 까끔(산)으로 가서 수만 번 부르다 보면 거기서 또 좋은 놈이 볼가져 나온다 그 말이여. 그것이 진짜 자기 소리여. 말허자면 똑같은 대목을 가지고 중모리로 해봤다가 진양조로도 해보고 자진모리로도 불러보고 하면서 연습을 해야 돼. 그렁께 여기서 어찌게 다 해볼라고 허지 말고 계속해서 자기 소리를 찾아가야 돼. 선생 헌티서는 골(骨)만 세우면 돼!”
그렇다 지금 명창은 숨구녘까지 세세히 본떠라고 하지만, 옛 명창들의 가르침은 스승의 법도를 그대로 따른 것을 무척 싫어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우린 잘못 알고 있다. 우린 스승의 권위를 존중하는 뜻으로 쓰고 있지만, 원래는 스승의 자취를 닮지 말라고 하는 뜻에서 한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것을 사의불사적(師意不師跡)이라고 한다. 스승의 뜻을 배워야지, 스승의 족적을 그대로 밟지 말라는 뜻이다. 헛깨비인 그림자조차도 닮으려고 밟지 말라는 뜻이다. 스승의 족적을 그대로 따라가면 흉내는 잘 낼지 몰라도 사이비(似而非)가 되기 때문이다. 외사조화(外師造化)라 했다. 진짜 스승은 천지자연의 조화가 스승이라는 뜻이다.
백아의 거문고 이야기가 생각난다. “수선조 (水仙操)란 시의 서문에는 백아가 처음 성련(成連)에게서 거문고를 배울 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련에게서 삼년을 배운 백아는 연주의 대체를 터득하였으나, 정신을 텅 비게 하고 감정을 전일하게 하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성련은 “내가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겠구나. 내 스승 방자춘(方子春)이 동해에 계시다” 하고는 그를 따라오게 하였다. 봉래산에 이르러 백아를 남겨두고 <내 장차 내 스승을 모셔오마> 하고는 배를 타고 떠나가 열흘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백아는 너무도 슬퍼, 목을 빼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단지 파도 소리만 들려올 뿐, 숲은 어두웠고 새소리는 구슬펐다. 그때 백아는 문득 스승의 큰 뜻을 깨달았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장차 내게 정을 옮겨주신 게로구나.” 하고는 이에 거문고를 당겨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느껴야 한다.
이른바 심수상응(心手相應)이다. 성련은 마지막 단계에서 백아가 강렬한 바램을 가지고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게함으로써, 말로는 도저히 전해줄 수 없었던,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최후의 심법을 전수해주었던 것이다.” (<한시미학 산책> 정민, 솔 p.55-56)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런 스승을 만나야 청어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을 못 만나면 모든 것을 떨치고 홀로 과감하게 무한한 자연의 세계로 진리를 찾아 나서야 된다. 간절하면 궁극에는 깨침이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