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갑 위에 더 센 갑이…’

고객 앞에서 이 보이며 웃으라고?…’슈퍼갑질’에 대항하라

백화점이 문을 여는 시간에 들어가면 직원들이 쭉 줄을 서서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나에게 인사하는 직원이 출근할 때 “어머니 회사 다녀오겠습니다”라고 깍듯이 인사하고 나온 직원이라면 괜찮겠다. 하지만 요즘 젊은 직원들이라면 “왜 늦게 깨웠어!”라며 짜증내며 나온 직원이 더 많지 않을까? 그들이 하는 절은 나를 향한 절이 아니다. 내 주머니에 절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때 선진국에 가면 친절하다고 배웠다. 우리도 선진국이 되려면 친절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만큼 친절을 강조하는 곳이 없다. 손님은 왕이다? 민주 사회에 왕은 무슨 왕. 유럽에 가보면 안다. 주인과 손님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깨지지 않는 한도에서의 친절,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이면 선진국 아니다.

존재감 낮을수록 우월성 과시 욕구

나에게 자세를 낮추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늘 자세를 낮추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람은 과도하게 자세를 낮추면 불안해진다. 내가 무리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 만큼 생존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능은 몇 천년으로 쉽게 안 바뀐다. 국민연금에, 실업수당이 있는 나라에서 산다고, 동굴 속에서 살 때 형성된 본능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나의 존재감이 낮아지면 코티졸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팍팍 분출되기 시작한다. 이건 진잔트로프스인이나 네안네르탈인이나 현대인이나 다 똑같다.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해서 낮아진 존재감을 회복해야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아이들은 폭력으로 이를 해결한다. 경쟁을 강조하면 폭력성은 커진다. 초등학교에서 석차를 매기는 유일한 나라에서 학교폭력이 심하고, 왕따가 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어른들은 ‘진상’을 부려서 이를 해결한다. 오늘 진상 손님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직원은 다른 어느 업소에 손님으로 가서 진상을 부리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한다. 진상짓의 폭탄돌리기다.

‘갑질’의 악순환

한때 이가 보이게 웃는 웃음을 강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업직 교육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인간은 웃으면 긴장이 풀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손님에게 조그만 실수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웃으란다. 긴장하며 긴장을 풀라고 한다. 감정의 모순이 생긴다. 우울증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입을 벌리며 웃으란다. 원래 인간의 자연스러운 웃음은 눈웃음에서 시작된다. 눈은 뇌의 상태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업을 하며 눈웃음을 짓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입을 벌리라고 강요를 하는 것이다. 웃지 않는 눈에 웃는 입은 섬뜩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에 그런 웃음이 나온다. 복수를 하러 간 조민수가 아들의 원수인 이정진 앞에서 그렇게 웃는다.

이런 잔인한 웃음을 강요하는 사람을 우리는 ‘갑’이라 부른다. 그런 잔인함을 감수하며 우울증에 빠져드는 사람을 ‘을’이라 부른다. 갑은 더 센 갑에게 을 노릇을 한 스트레스를 더 약한 을에게 풀고 있다. 센 갑 위에는 더 센 갑이 또 있다. 모든 갑질의 꼭대기에는 슈퍼갑이 있다.

슈퍼갑질에 동의하는가? 아니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자. 90도로 절을 하는 백화점에는 가지 말자. 꿇어 앉아 서빙을 하는 음식점에도 가지 말자. 종업원이 편하게 목례를 하며 자연스러운 눈웃음을 짓는 업소에 가자.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작은 실천이다. 게다가 그 실천에는 보너스가 따른다. 그런 업소는 최소한 바가지를 씌우는 곳은 아니다. 업소 주인이 손님에게 한 푼이라도 더 우려내려 하는 곳의 종업원에게는 그런 자세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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