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의 마음산책] 감정 이야기⑭ “권력자에 대한 요구, 정의감? 시기심?”

정의감이 시기심과 다른 것… “이타심, 공감, 안정 욕구”

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가 되었는데, 정리할 것이 하나가 남았군요. 시기와 질투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때 소개했던 프로이드의 말이 있었습니다. “정의감이란 공적으로 표현되는 시기심이다”라는 조금은 거북한 이야기 말입니다. 쉽게 동의가 되시던가요? 이 말 자체는 깊게 새겨둘만한 말입니다. 우리가 정의라고 주장하는 행동의 아래 시기심이 깔려있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정의감을 시기심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곤란하지죠. 이제 이 둘의 차이를 알아봅시다.

정의감이란 사실은 기본 감정은 아닙니다. 몇 가지 기본 감정의 복합체입니다. 중요한 뿌리의 하나는 이타심입니다. 앞에서 미어캣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지구상에서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종은 기본적으로 이타심이 있습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우리가 구해주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우리가 애당초 그렇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구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반대로 아이가 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몹시 나빠집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이타 본능이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공감 본능도 있습니다. 신생아실에 가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울면 따라 울지요. 대화를 할 때 보면 사람은 무의식중에 상대의 손동작을 따라하고, 표정을 따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감 역시 우리의 본능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기 힘든 것은 내 앞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으면 기본적으로 나 역시 고통을 느끼도록 설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중요한 것으로 안정에 대한 욕구도 관여가 됩니다. 사회의 기본 규칙이 자주 흔들리면 그 만큼 삶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습화되어 있는 규칙이 바뀌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도덕이라는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 규칙을 흔드는 것은 거부감을 많이 일으킵니다. 이것 역시 정의감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만, 이 정도로도 시기심과 구분의 기준은 될 것 같군요.

정의감의 조건 네가지

정의감이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려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옳은 것을 지키려다보면 그른 것에 대한 공격이 필요할 때가 생깁니다. 이때가 애매해집니다. 지키기 위한 공격인지, 공격 자체를 위한 공격인지가 애매한 경우가 있거든요. 정의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대략 네 가지쯤 됩니다. 일단 공공의 문제일 것, 그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뚜렷할 것, 구조적인 문제일 것,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저항의 목적이 구조의 개선, 혹은 구조의 개악의 저지에 있을 것. 이 조건을 만족한다면 대략 정의감이라 불러줄만 합니다. 희망버스 같은 경우는 이 조건들을 거의 만족을 시킵니다.

‘진요’라고 하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인기인을 대상으로 ‘누구누구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주장을 하는 모임들이지요. 이들 역시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위에서 말한 조건들을 거의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인기인은 그들이 만드는 이미지를 상품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미지와 그 사람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지, 그저 그 이미지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 인기인의 실체가 어떤가는 크게 문제가 아닙니다. 또 ‘진요’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인기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나친 것 자체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려 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비리를 밝혀내서 인기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요. 이런 경우는 프로이드의 말이 정확히 적용되는 경우입니다.

대중이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것 ‘노블레스 오블리주’

애매한 경우는 권력자의 경우입니다. 권력자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구조거든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구조로 작용하고 있을 때는 구조의 개선과 개인에 대한 공격은 경계가 애매해집니다. 또 재벌이라든지, 사정기관과 같이 구조이며, 막강한 힘을 가진 특정 집단의 경우 역시 애매합니다.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인지, 그 구조의 개선에 대한 요구인지가 애매하거든요.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요구를 시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대중은 정의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견해가 갈리게 되면 해결책이 나오기 힘들어집니다. 안으로 곪고 사회 전체가 불신의 사회로 가게 되지요.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시기심이냐, 정의감이냐를 따져봐야 쉽게 합의에 이르기 힘드니까, 아예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도록 만들자는 겁니다. 그래야 사회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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