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의 마음산책] 사랑이야기② “애착, 사랑과 집착 사이”
사랑과 집착은 자주 혼동이 되는 감정입니다. 옆에서 보기에는 집착인데, 본인은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집착과 사랑이 혼동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집착과 사랑 중간에 있는 것이 하나 있거든요. 사랑에서 한 글자를 따고, 집착에서 한 글자를 따면 만들어지는 단어. 애착이라는 것이 있지요. 이게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애착은 사랑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애착의 병적인 모습이 집착이거든요. 오늘은 애착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봅시다.
애착과 공감은 사랑을 구성하는 큰 두 개의 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한 보편적 사랑이라는 것은 공감이 바탕이 됩니다. 이런 사랑은 별다른 대가를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상대가 행복해하면 그 자체로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그것이 대가일 뿐입니다. 주는 사랑입니다. 애착은 다릅니다. 상대에게 확실하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받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기에서 시작을 합니다. 나를 보호해주고, 먹여주는 엄마라는 존재가 없으면 아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아기는 당연히 엄마에 집착하게 됩니다.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엄마가 다시 나타나면 없어졌던 것에 대한 분노를 표현합니다. 아기에게 있어 집착은 당연한 본능입니다. 병이 아니지요. 하지만 아기는 자랍니다. 당연히 집착도 옅어집니다. 나이에 맞는 형태로 옅어진 집착. 그것이 애착입니다. 정서 발달이 원만히 안 돼서 여전히 집착의 단계로 남아있으면 그게 병이지요.
애착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안정의 욕구입니다. 인간의 욕구 중에 가장 먼저 발달하는 욕구입니다. 사람에 대한 애착뿐만이 아닙니다. 물건에 대한 애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한 물건은 안정감을 줍니다. 그래서 애착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또 어떤 물건들은 나의 삶의 의미를 대변하기도 합니다. 나라는 존재의 안정감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애착의 대상이 됩니다.
애착이 사랑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애착의 대상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는 그 대상에 애정을 쏟게 됩니다. 소중한 것이니까요. 사랑의 감정은 애착에서부터 발달을 합니다. 또 위에서 애착은 받는 사랑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내가 누구에게 애착을 보이면 상대는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 느낌은 나의 공감 능력을 강화시키도록 만듭니다. 아기가 표현하는 애착의 사랑이 부모에게는 공감의 사랑을 자라게 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이래저래 애착은 사랑의 출발점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랑이 미움과 같이 가는 사랑이라는 것이 골치 아프지요. 엄마가 없어졌다가 나타나면 분노를 표현하는 아이의 마음이 바로 그 미움입니다. 애착은 그 대상의 반응이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면 바로 배반감, 상실감 등을 부르는 사랑이거든요. 애착을 기준으로 보면 사랑과 미움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라는 말이 있지요? 상당히 그럴듯한 말입니다. 애착이 없는 상태는 무관심입니다. 미움은 애착이 있으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애착을 아름다운 사랑의 씨앗으로 유지하려면 두 가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미움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의 문제는 애착이 집착으로 넘어가는 문제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할 예정인데, 간단히 조금만 이야기해 볼까요? 애착은 안정의 욕구에서 발달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걸 뒤집어보면 집착이 이해가 됩니다. 집착은 불안감의 표현입니다. 돈에 대한 집착, 명예에 대한 집착, 외모에 대한 집착… 모두 따지고 보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불안감이지요. 사람에 대한 집착 역시 바탕은 불안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