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醫 김명근의 마음산책] 성격 이야기⑥ “부모의 거부, 아이의 장점도 무너뜨려”
자율성의 기본은 ‘자기수용’과 ‘자기일치’
자율성 척도는 ‘책임감’, ‘목적의식’, ‘유능감’, ‘자기 수용’, ‘자기 일치’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중 좀 더 기본이 되는 것은 어느 것일까요? 확실한 연구 결과는 없습니다만, 제 임상 경험으로는 ‘자기 수용’, ‘자기 일치’ 쪽이 더 중요한 것 같더군요. 자기 수용, 자기 일치가 높으면서 다른 척도는 별로 안 높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상담을 통해 끌어올리는 것이 쉽더군요. 반대로 책임감, 목적의식 같은 것은 높아도 자기 수용 등이 낮은 경우는 잘 안 올라갑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성공할지 모르겠으나 강박적인 느낌을 주는 경우도 많고,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이의 자율성 척도를 가장 망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칼럼에서 통제, 거부, 방치, 공격의 네 가지를 제시했지요. 그리고 통제에 대한 것을 주로 이야기했습니다. 통제는 확실히 자율성을 망칩니다. 그런데 통제는 주로 책임감, 목적의식을 망치지요. 유능감도 떨어뜨리고. 자기 수용이나 자기 일치 척도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부모의 통제보다는 부모의 거부 쪽이 더 큽니다. 자녀의 기질을 인정하지 못하고 기질 자체를 뜯어고치려는 태도. 그것이 자녀의 자율성의 가장 큰 토대를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날 수 있을까요? 사람의 팔은 새 날개와는 구조가 다릅니다. 하지만 새보다 훨씬 더 빠르게, 수십 배 빠르게 휘저으면 어떨까요? 날 수 있을까요? 그래봐야 안 되겠지요. 그런데 그런 부모가 있습니다. 옆집 새는 나는데, 새보다 더 똑똑한 너는 왜 못 나냐고, 팔을 좀 더 열심히 휘저으면 날 수 있다고 우기는 부모가. 자녀를 날게 하겠다고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다리 한두 개 부러지는 것으로 막으면 다행이고,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정말 사람은 날 수 없나요? 아니 날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날 수 있습니다. 날개를 갖지 않은 내 아이가 날기를 원한다면 내 아이에게 팔을 더 빠르게 휘두르라고 몰아쳐서는 안 됩니다. 유체 역학을 공부하고, 기계 공학을 공부시켜야 합니다. 비행기를 설계하고 제작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내 아이가 모는 비행기는 옆집 아이의 날개짓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더 높게 나르기 시작합니다.
자아정체성…사람마다 다른 ‘기질’ 인정해야
기질의 차이란 그런 것입니다. 새와 사람이 다르듯이 옆집 아이와 우리 집 아이의 특성이, 장점이 다른 것입니다. 침착한 아이에게 재촉을 하면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경솔해질 뿐입니다. 부모는 단점을 없앤다고 거부를 하지만, 아이는 단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점이 오히려 망가집니다. 침착한 아이가 빨라지게 하려면 충분한 경험을 쌓게 해야 합니다. 아이의 기질에 맞는 속도로,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로 차분히 경험을 쌓아갈 수 있게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타고난 기질을 인정할 때 아이는 단단하고, 건강하고, 긍정적인 자아정체성이 형성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자아정체성은 그 이후의 모든 인격발달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동화 이야기로 오늘 칼럼을 마무리할까요? 어느 사냥꾼이 독수리 새끼를 잡았답니다. 집에 와서 가는 쇠사슬을 다리에 채워놓았다지요. 독수리는 당연히 날려고 하겠지요. 그때마다 다리를 다쳐 피가 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날려고 하던 독수리는 점차 날려는 시도가 줄어들게 됩니다. 하루에 한두 번, 나중에는 며칠에 한 번. 결국은 날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게 됩니다. 독수리는 이제 다 커서 힘 센 날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굵어져서 가는 쇠사슬 따위에는 별 상처도 안 입게 되었습니다. 반면 쇠사슬은 이젠 낡을 대로 낡아 끊어지기 직전입니다. 한번만, 단 한번만 날개짓을 하면 쇠사슬은 끊어지고 독수리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날지 않습니다. 슬픈 눈으로 쇠사슬만 바라봅니다. ‘저 사슬만 없으면 날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녀에 대한 거부란 그런 것입니다. 너무 늦게 풀어주면 풀어주어도 날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