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醫 김명근의 마음산책] 성격 이야기① ‘나의 행동, 성격 반 학습 반’
성격… 트라우마? 기분? 조건반사?
흔히 쓰는 단어지만 정의가 애매한 것들이 있습니다. 성격이라는 단어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개만 보면 부들부들 떠는 것을 성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경우는 대부분 어릴 때 개에게 크게 놀란 적이 있는 경우지요. 그런 것은 성격이라고 부르지 않고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하지만 똑같이 놀라도 그 상처를 강하고 길게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노력으로 극복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런 부분은 보통 성격이라고 부릅니다. 또 비슷한 성격에 비슷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날 기분이 어떠냐, 누구와 같이 있느냐에 따라 행동은 또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를 성격이라고 부를 것인가는 참 애매한 구석이 있지요. 애매한 것은 논쟁을 부릅니다. 성격 이론 역시 많은 논쟁을 불렀지요.
한 때는 성격에 대한 연구라는 것 자체가 비과학적인 것으로 취급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이라는 분야가 크게 힘을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파블로프’라고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만 쳐서, 나중에는 먹이를 안 줘도 종만 치면 침을 흘리게 만드는 실험을 했던 사람이 있었지요. 그런 식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 역시 학습된 조건반사로 해석하는 방식이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격 이론의 도입 없이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확실히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는 떨어져 살았더라도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는 이런 경향이 훨씬 더 강합니다. 서로 떨어져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경우라도 비슷한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논쟁을 보면 묘한 생각이 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학술적인 논쟁은 완전히 논리적인 면을 가지고 과학적인 태도로 다툰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격렬한 논쟁의 뒤에는 자신의 바람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접근 방식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줍니다. 아울러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아름다운 믿음을 지지하지요.
하지만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면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이 도저히 해결 안 되는 상황에서 ‘성격 차이야’라고 해 버리면 차라리 포기하기 쉽거든요. 이해할 수 없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에 대해서 ‘나와 성격이 다르다’라고 생각하면 적절한 타협점이 되지요. ‘성격 차이’라는 것이 이혼 사유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격 차이’라는 이혼사유는 뒤집어 말하자면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둘 중 누가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라는 면책을 주니까요.
심리학이란 사람의 행동 동기를 다룹니다. 그런 면에서는 그 어떤 학문보다 과학적일 수 있습니다. 바람이라는 것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심리학의 출발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심리학의 논쟁 역시 저 같이 좀 비뚤어진 사람의 눈으로 보면 “꼭 과학적인 논쟁이었을까? 자신의 희망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이 가지요. 정치적인 논쟁, 사상적인 논쟁의 대부분에서 저는 그 이면의 투쟁을 봅니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라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란 이런 존재이면 좋겠다는 희망끼리의 충돌이지요. 무언가를 주제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내 주장이 희망이 반영된 주관적인 것은 아닐까를 늘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나요? 어쨌든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꽤 복잡했지요. 결론은?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성격이란 존재하지만 행동을 결정하는 모든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행동은 타고난 성격과 학습된 결과가 같이 맞물려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즉 무조건 성격 탓으로 돌리지도 말고, 그렇다고 성격 차이를 무시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운만 떼고 끝내겠습니다. 우리의 행동 패턴 중에 어떤 부분을 성격이라 부를 수 있는지, 또 성격과 무관한 후천적인 면은 어떤 부분인지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주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