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醫 김명근의 마음산책] 감정 이야기③ “우리는 왜 분노할까?”

강한 분노가 공포를 억눌렀던 기억

몇 년 전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진 적이 있습니다. 비도 조금 오는 밤길이었습니다. 타이어 옆면이 무언가에 찍힌 거죠. 갑자기 차가 획 돌기 시작하더군요. 유원지 놀이기구라도 탄 것처럼 시야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차는 길 옆의 콘크리트 보호벽을 두 번쯤 박고 나서야 섰습니다. 내려서 보니 차는 뒤쪽이 확 우그러져 있었습니다. 길에는 차의 트렁크에서 튀어나온 물건들이 로드킬 당한 동물의 내장처럼 흩어져 있더군요.

제법 큰 사고였지요. 차축이 휘어버려서 수리가 안 되고, 폐차를 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 차가 마지막으로 멈춘 장소는 갓길로 완전히 붙은 자리였습니다. 다행이었죠. 밤에 길 가운데서 서버렸다면 더 큰 사고를 불렀을 테니까요. 덕분에 아직 살아서 이렇게 칼럼도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연히 그렇게 섰냐고요? 글쎄요. 행운도 상당히 따르기는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핸들을 감았다, 풀었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놓았다 하며 나름 애를 썼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요? 제가 유난히 대담해서? 운전 실력이 뛰어나서? 평소에 침착해서? 아니, 아닙니다. 그런 이유라면 이 칼럼에서 그 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겠지요.

차가 처음 돌아가던 순간을 기억을 합니다. ‘이건 뭐야?’하는 생각이 들면서 짜증이 확 밀려오더군요. 시야가 돌기 시작할 때는… 타기 싫은 롤러 코스터를 억지로 탔는데, 누군가 어디 멀미하나, 안 하나 보자며 낄낄거리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기분 참 더럽더군요.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저를 지배했던 가장 큰 감정은 분노였습니다. 무언가 운명에게 희롱당하는 듯한 느낌. ‘니 맘대로는 안 될 걸’이라는 생각이 들고, ‘보란 듯이 살아남는 걸 보여 주겠어’라는 오기도 생기고…. 그 당시가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평소에도 몸에 코티졸이나, 아드레날린 분비가 왕성하게 되던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바로 분노 반응이 일어났겠지요. 지난주에 말씀드렸지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의 거부 반응은 분노 아니면 공포라고. 분노가 워낙 강하게 이니까 공포가 억제된 것이지요.

이론적인 이야기를 조금 하고, 다시 위의 사례를 분석해 봅시다. 분노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꼽는 것이 좌절입니다. 그런데 좌절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이 없으면 좌절할 수가 없지요. 우울한 사람은 잘 좌절하지 않습니다. 좌절을 견디기 힘들어서 희망도, 시도도 줄여버리는 것이 우울이니까요. 즉 분노는 희망의 좌절에 대한 반응입니다. 희망을 가지는 사람만이 분노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분노의 또 다른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는 주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 맘대로 되지 않아!”…분노의 시작?

물론 주도성이 강하다고 다 화를 잘 내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충분히 주도할 수 있다면, 즉 능력이 충분히 있다면 분노는 덜 하겠지요. 때론 자신의 의도대로 안 될지라도 다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쉽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원하는 주도성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주도성과의 차이가 분노를 부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당한 사고의 경우는?사실 그리 큰 좌절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다는 의지의 좌절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많이 지친 상태였고, 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그 정도로 심한 분노를 느낄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당시의 스트레스의 주원인이 주도성 침해였다는 것이지요. 일은 내 뜻대로 안 되는데, 이게 구조적인 문제라서 나 혼자 다 뜯어 고칠 수도 없는 상황. 그런 상황이 몇 달 째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차가 돌기 시작한 거죠. 운명이 또다시 희롱을 한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일시에 분노가 폭발하더군요.

분노를 주도성과 관련해서 생각을 하면 분노의 조절에 대한 여러 가지 힌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분노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다른 사람의 분노를 촉발하는 일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 화를 잘 내는 아이는 양육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분노를 미성숙의 증거로 보는 것인가? 등등의 문제가 주도성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됩니다. 다음 주 칼럼을 올리기 전까지 한 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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