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醫 김명근의 마음산책] 감정 이야기⑨ “시기와 질투의 뿌리는 경쟁심”

시기와 질투가 사회적 감정으로 변형된 ‘이것’

오늘 칼럼은 퀴즈로 시작해 볼까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사회의 혼란기가 되면 더 자주 등장하게 되는 단어입니다. 이를 프로이드는 “시기와 질투가 사회적인 감정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힌트를 좀 더 드릴까요? 위의 문제의 답을 듣고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드의 학설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것들이 많았지요. 그 중에는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도 불편한 내용도 있습니다. 위의 것은 그중에도 대표적인 것입니다.

답은 정의입니다. 중세에는 정의란 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라고들 여겼지요. 시기와 질투란 악마가 만든 것이라고 보았고요. 신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를 벗어난 뒤에도 분위기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고, 시기와 질투란 인간을 동물 수준으로 타락시키는 이기심의 발로라고 보았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정의감과 시기심은 같은 것이라고 했으니, 프로이드가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확실합니다.

정의(正義)에 대한 위의 정의(定意)에 쉽게 동의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노조는 빨갱이나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면 위의 정의에 쉽게 동의를 할 것입니다. 천재 하나가 국가를 먹여 살린다든지, 교육의 핵심은 엘리트의 양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위와 같은 견해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대충 그림이 보이시나요? 시기와 질투의 뿌리는 경쟁심입니다. 경쟁심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의 하나입니다. 즉 시기와 질투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정의란 경쟁에서 패배한 약자들의 믿는 미신일 뿐이다’라는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꼭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원래 경쟁에 강한 유전자가 후손에게 전해질 가능성이 높지요. 경쟁에 이긴 사람이 후손을 퍼뜨릴 확률이 더 높으니까요. 인간이 계속 이렇게 진화를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은 극도로 경쟁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경쟁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나요? 체제내의 구성원들이 모두 강해지면 그 체제도 강해질까요? 강해지면 더 번영을 하게 될까요? 역사를 되짚어 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안정적이며 번영을 하는 경향이 확실히 있습니다.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는 일시적으로는 발전하는 것 같지만 내부적인 불안정 때문에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쟁하면서 어떻게 이타적일까

정의란 단순한 시기심의 발로일까요? 거기에 어딘가 이타라는 다른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경쟁 못지 않게 이타 역시 체제의 안정과 발전에 공헌을 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적절한 이타 유전자가 전달이 될 때 그 종족이 번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생물은 그 생물종의 유지에 유리한 성향을 유전시키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이번 주부터는 시기와 질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지난주까지 이야기했던 분노보다 어쩌면 훨씬 더 묵직한 주제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기와 질투를 이야기하려면 경쟁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경쟁을 이야기하려면 이타에 관한 이야기 역시 해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란 무엇인가도 간단히는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정의란 무엇인가도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본격적인 사회학, 정치학, 철학 강론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심리학 산책을 위해 필요한 정도만 다룰 예정이니까요.

오늘 칼럼을 퀴즈로 시작했으니 퀴즈로 끝을 내겠습니다. 오늘은 시기와 질투를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했는데, 사실 이 두 가지는 약간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답은 다음 주 칼럼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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