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군자의 의리는 헤어짐에서 빛난다

의리의 심리학…체면 세우는 ‘야쿠자 의리’와 자기 편만 감싸는 ‘양아치 의리’

‘의리’란 무엇일까? 한자로는 ‘義理’라고 쓴다. 글자대로 풀면 ‘옳음의 이치’라는 뜻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꿋꿋하게 해 나가는 것이 의리의 본질이다. 자기편을 무조건 감싸거나 도움을 받은 만큼 보답한다는 것은 의리의 본뜻과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어쩌다가 의리라는 말이 그런 의미를 갖게 되었을까?

원래 무조건 돕거나 감싸주는 것은 보답을 받기 힘들다. 당연한 이치다. 내가 갑돌이에게 100만 원을 빌렸다. 그리고 을순이에게 100만 원을 빌려주었다. 나는 누구와 같이 있을 때 마음이 편할까? 반대로 나와 같이 있을 때 마음이 편한 것은 갑돌이일까? 을순이일까? 빚을 졌다는 느낌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 불편함을 면하려면 상대가 나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온갖 희생을 다 해가며 기른 자식이 절대 효자가 될 수 없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그런 자식들은 원래 부모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움을 잊지 않고 호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상대의 도움 덕분에 내가 떳떳할 수 있었을 때, 그 도움의 기억은 오래 가고,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떳떳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중요한 본능이다. 떳떳함은 자기 긍정으로 이어지고, 책임감, 유능감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의(義)를 옳음이라고 할 때 그 옳음은 논리적인 정확함(正)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떳떳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무조건 편들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떳떳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살다보면 같은 길을 가던 사람 사이에서 서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질 때가 있다. 상대가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려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는 그 헤어짐이 정중하다. 3당 합당에 참여하지 않은 어느 정치인은 “존경하는 선배였는데, 지향점이 달라 끝까지 같이 갈 수 없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제는 그를 따르던 사람이 그를 떠나는 일이 생겼다. 아랫사람들은 의리를 저버리니 뭐니 떠들었지만 당사자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옳음을 찾아 떠나는 이를 존중했다.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기일이면 그의 무덤을 찾는다. 의리란 무조건 끝까지 같이 가는 것이 아니다. 떳떳함을 추구하는 사람끼리의 존중. 그것이 진짜 의리다. 헤어짐에서 오히려 빛날 수 있는 것이 군자의 의리다.

떳떳한 사람은 의리라는 말을 입에 올릴 일이 없다. 그저 그렇게 살 뿐이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들을 흉볼까봐 늘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훨씬 더 의리를 내세운다. 옳든, 옳지 않든 내가 네 체면을 세워줄 테니, 너도 내 체면을 세워 달라. 이것이 패거리 문화의 의리다. 야쿠자 의리다. 오야붕은 꼬붕의 가오를 세워주고, 꼬붕은 오야붕의 가오를 위해 목숨을 건다. 하는 일이 떳떳하지 않기에 그렇게라도 서로 긍정감을 심어주지 않으면 수치심을 달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야쿠자 의리만 못한 것도 있다. 무조건 윗사람의 체면만 중시하고, 아랫사람의 체면은 무시하는 의리다. 무조건 우리 편을 감싸지 않으면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 사람은 사생활을 뒤지고 모욕을 줘서라도 떠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저질스러운 의리다. 나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지켜내기 위해 변호를 하고, 논쟁을 한다는 것은 사람을 심하게 피폐하게 한다. 그런 일을 의리라는 이름으로 아랫사람에게 강요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게 저질이다. 그런 것에 적합한 이름이 있다. 양아치 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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