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개인은 착한데 왜 집단은 잔혹할까
책임 분산 메커니즘…자율성 살리기가 관건
공룡이 새집을 밟았다. 갓 태어난 어린 새들이며, 막 태어나려던 새알들이며 모두 밟혀 으깨졌다. 누구 잘못일까? 직접 밟은 발바닥? 발바닥은 다리에 매달려 있었을 뿐이다. 다리? 다리 근육은 신경을 따라 내려오는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지시를 내린 뇌는? 발바닥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정보를 전달해줄 눈은? 전방 주시에 바빠 발바닥까지 살필 여유가 없었다.
어디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일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어린 새 사체나 깨진 알을 보고 가슴이 아프다면, 다시 생각해 보자. 공룡보다는 좀 민첩한 사람이라면, 그것도 잘 훈련된 무술가라면 어땠을까? 바닥에 뭔가 닫는 느낌이 있는 순간 바로 다리를 오므렸을 것이다. 어떤 차이일까? 잘 훈련된 사람은 반사동작이 가능하다. 뇌까지 정보가 가지 않고 척수에서 바로 동작 지시가 나온다. 혹시 뇌까지 가도 대뇌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소뇌가 바로 처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심리학은 한 주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도덕적 개인이 모인 조직이 왜 비도덕적 행동을 하는가’이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많은 심리실험이 이뤄졌다. 결과는 말한다. 사람이란 흰 가운을 입은 자의 지시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수백 볼트 전기충격을 가하고,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쓰러진 사람을 못 본체 지나가고, 너무 쉬운 문제에서도 다수가 오답을 지지하면 슬그머니 오답 쪽에 서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성은 책임감에서 나온다. 그런데 조직은 책임을 분산시키고 도덕을 약하게 만든다.
가장 조직적인 경영을 한다는 대기업이 있다. 세계일류 기업이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그 기업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죽었다. 하나도 아니고, 같은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여럿이. 그래도 모두 개인의 문제란다. 절대 산업재해는 아니란다. 그 기업의 누구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다. 그저 덮고 무마하기에 애쓸 뿐이다. 그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초록은 동색이라던가? 재벌그룹에 속한 영화관이 알아서 스크린을 축소한다. 세상이 사실을 알아주기라도 원한다는 간절한 소리를 묻어버리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사람을 칼로 찌르라면 누구나 멈칫할 것이다. 그런데 버튼을 누를 때마다 1mm씩 칼이 파고 들어가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하자. 이 버튼을 누르는 것은 혼자 칼로 찌르는 것보다는 훨씬 부담을 덜 느낄 것이다. 그래서 100명이 버튼을 눌러 한 사람을 죽였다. 그 사람들은 살인의 100분의 1 책임만 지면 되는 걸까? 아니다. 그 모두를 살인죄로 처벌해야 한다. 사회구조가 그런 구조가 되어야 하고,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의 심리실험 참가자는 권위에 굴종하거나, 군중에 숨어버리거나, 다수를 따라갔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 소수는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자율성이 발달된 사람들이다. 심리학은 말한다. 책임감도, 창조성도, 협동심도 그 모든 뿌리는 자율성에 있다고. 그리고 도덕성의 뿌리 역시 자율성에 있다고. 일사불란한 조직이 도덕적이었던 경우는 인류의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다. 2차 대전으로 이를 깨달은 유럽은 교육을 바꾸었다. 그들은 자율성을 중시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고 있다.
모든 것을 조직이 책임지고, 모든 판단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만 하는 기업이 언제까지 일류 기업일 수 있을까?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기업은 도덕성이 무너진다. 창조성도 함께 무너진다. 결국기업 자체가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