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믿을 수밖에 없는 믿음은 재앙이다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그들은 너무 멀리 나간 걸까”
동물도 기억을 하고, 판단을 한다. 무엇이 위험하고 안전한지, 어디에 가면 먹이를 구할 수 있는지를. 그런데 판단이 계속 옳을 수는 없다.
몇 번 계속 어긋나면 동물은 판단 기준을 바꾼다. 쿨하게 바꾼다. 사람의 판단은 동물보다 정교하다. 기억도 정밀할 뿐 아니라, 추론, 비교, 예측 등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다. 인간을 현재 상태로 만들어 준 귀한 능력들이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인간의 그런 능력에는 대가가 따른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면 이유를 찾는 경향이 있다. 즉 몇 가지 작은 변수의 문제이지, 전체적으로는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결론을 내리고자 애쓴다는 것이다. 동물만큼 쿨하지 못하다. 집착. 그것이 인간만이 가진 능력에 대해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1950년대 미국 미시간 주에 살던 한 중년여성이 외계인 수호자에게 메시지를 받았다며 종말론을 주장했다. 주변의 추종자들이 모여 종말을 대비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종말에 대한 몇 번의 예측이 어긋났다. 그러나 많은 구성원들이 그들의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종말 날짜가 바뀌었다고 주장을 하더니, 마지막에는 그들의 기도로 인해 종말 계획이 바뀐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리학자인 레온 페스팅거 교수 연구팀은 이 집단에 연구원을 투입시켜 그들의 언행을 기록했다. 그 기록에 나오는 말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의사라는 사회적으로 존중 받는 직업을 포기하고 그 집단에 참여했던 구성원의 말이다. “나는 너무 멀리 나가 버렸다. 모든 인간관계는 끊어졌다. 나는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믿을 수밖에 없다.” 믿을 수밖에 없는 믿음이란 재앙이다.
반대를 허용치 않는 폭압적인 군사독재, 점점 벌어지는 빈부격차, 일상이 돼버린 부패, 언론과 사법부마저 힘에 아부하는 세상. 당연히 무너져야 할 나라라고, 당연히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는 무너지지 않았다. 많은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매우 느린 속도이기는 했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문제를 극복해 갔다. 조금은 더 나은 세상으로 바뀌어 갔다. 세상은 무너져야 바뀐다는 생각, 혁명만이 길이라는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너무 멀리 나가 버린 걸까?
호전적인 군사국가와 대처하고 있는 나라. 자원도, 축적된 자본도 부족한 나라. 일사불란함이 조금이라도 깨지면 나라가 곧 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견을 말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입을 막아야 한다고, 비열한 공작이든 인권유린이든 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혹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더라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인권을 중시하고 절차를 중시하는 세상으로. 바뀐 세상을 따라가기엔 그들 역시 너무 멀리 나가 버린 걸까?
‘하늘이 무너질까봐 늘 걱정하던’ 토끼는 야자열매 하나가 떨어지자 “하늘이 무너졌다!”고 외치며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남북관계가 조금 험악해지자 몇 마리 토끼가 “전쟁이 임박했다. 미뤄졌던 혁명의 시기가 비로소 다가왔다”며 뛰기 시작했다. 이를 본 다른 몇 마리 토끼가 “내란이 일어난다. 나라가 위태롭다”며 뛰기 시작했다. 이솝 우화의 숲 속 동물들은 토끼를 보며 정신 없이 같이 뛰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거 뛸 일이야?”라며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다. 다만 토끼를 따라 뛰었던 몇몇 여우며 사슴이 같이 뛰어야 된다며 펌프질 해대고 있을 뿐.
믿음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지만,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는 믿음은 재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