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악다구니 주먹 vs. 점잖은 총칼
누가 더 잔인한가 “느낌으로만 해석하지 마라”
영화가 흥행하려면 주인공이 멋있어 보여야 한다. 칼을 든 상대를 맨 주먹으로 제압하는 장면같은 게 필요하다. 반대로 주인공이 상대보다 강한 무기를 쓰는 것은 치사해 보인다. 당연히 금기사항이다. 그런데 가끔 규칙을 깨는 영화가 있다. <인디아나 존스> 1편에 그런 파격이 나온다. 웬 아랍인이 큰 칼을 휘두르며 나타난다. 관객들이 한바탕 활극을 기대할 때 주인공은 가볍게 총 한방으로 제압한다. 그런데 왠지 주인공이 찌질해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표정에 그 비밀이 있다. 칼 든 아랍인은 표정이 사납다. 공격성이 느껴진다. 그때 인디아나 존스의 표정이 살짝 잡힌다. ‘저건 또 뭐야?’하는 귀찮은 표정이다. 그리고 가볍게 한 방. 잔인한 야만인을 점잖은 문명인 주인공이 나무라는 듯한 분위기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칼은 싸우기 싫으면 도망갈 수 있다. 하지만 총알보다 빠르게 도망칠 수는 없다. 상대에게 당했을 때 죽을 확률도 총 쪽이 압도적으로 높다. 총은 칼보다 훨씬 더 잔인한 무기다. 아이가 벌레를 밟는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자. 아이의 표정? 벌레 때문에 약간 놀랐든가, 그냥 호기심에 차 있다는 표정이다. 전혀 잔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벌레는 밟혀 내장이 터지고, 으깨졌다. 벌레를 근접촬영해서 본다면 굉장히 잔인한 장면이다.
인간의 본능은 수십만 년에 거쳐 형성됐다. 그 대부분 기간 동안 인간 사이 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물리력이 비슷한 상태에서 상대를 제압하려면 내 공격력을 최대한 끌어 올려야 한다. 그 공격성, 분노 등은 표정으로 나타난다. 본능은 이를 위험성, 잔인함 등으로 해석한다. 인류가 살아온 대부분의 기간에 이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집단이 커지고, 계급이 생겨났다. 현대 사회에서 권력자가 공권력을 통해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과 가난한 철거민이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의 차이는 매우 크다. 벌레와 아이의 차이 이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능은 아직 몸으로 부딪히던 시절, 기껏해야 몽둥이나 휘두르던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 본능이 총을 쓰는 인디아나 존스는 점잖은 쪽으로, 허공에 혼자 칼을 휘두르다 총맞고 쓰러지는 아랍인 엑스트라는 잔인한 쪽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독재를 뒷받침하는 실권 없는 2인자는 대부분 학자나 관료 출신 점잖은 인상의 소유자다. 대독 총리니, 설거지 총리니 하는 말을 들었던 대부분의 국무총리들이 표정 하나는 온화함의 극치다. 왠지 국민들을 위하는 정부처럼 보인다. 잔인하게 제압하는 부대는 표정이 없다. 표정만 보면 악다구니 쓰는 시위대가 훨씬 더 잔인하고 위험해 보인다. 그런데 그런 판단을 하는 본능은 수십만 년 묵은 구닥다리다.
느낌을 믿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됐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꼼꼼히 따져보고, 그 뒤에 누가 잔인한가, 누가 더 위험한가를 파악해야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몽둥이를 쓰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힘을 줘야, 얼마나 분노를 끌어올려야 상대를 때릴 수 있는지 안다. 칼을 쓰는 것만 해도 온몸이 긴장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볍게 방아쇠 하나를 당기는 사람은 그 잔인함에 둔감하기 쉽다. 늘 힘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모른다. 뼈 빠지게 일해 궤도에 올려놓은 가게를 보상금도 없이 철거해 버리는 것이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얼마나 처절한 부정인지를. 그저 한 마디 지시만 내리는 사람은 그 잔인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정중하게 잔인하다. 그런 잔인한 진압의 책임자를 다시 공기업의 사장으로 앉히는 정부는, 정부 총책임자의 절제된 말투와 무관하게 잔인한 정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