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티베트 만수, 나마스테!’

같음과 다름의 철학

불안의 다른 이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름’이다. 공포의 다른 이름은 ‘대처 방법 없음’이다. 낯선 것은 잘 모른다. 그래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나와 비슷한 것은 나를 통해 짐작하면 된다. 나와 다른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사람은 다름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하지만 같음에 대한 거부감은 더 크다. ‘도플갱어(Doppelganger, 꼭 닮은 사람)’를 마주치면 죽게 된다는 미신마저 만들어낼 정도로 크다. 유전적으로 통일이 되면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근친상간에 대한 터부가 그 예이다. 또 모두가 같으면 같은 자원을 놓고 다투게 된다는 것도 문제다. 모두 빨간 옷만 좋아하면 빨간 염료의 가격은 끝도 없이 오르게 된다. 게다가 다름은 생명의 원천이다. 다름이 흐름을 만든다. 높이가 달라 물이 흐르고, 기압이 달라 바람이 분다. 우리는 그 흐름 덕분에 산다.

우리는 다름에 대한 거부와 같음에 대한 거부라는 양 끝의 어느 사이에서 산다. 방어적이고, 위축되어 있고, 소극적인 사람은 다름에 대한 거부가 더 크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은 같음에 대한 거부가 더 크다. 어느 사회가 더 발전할까? 같음에 대한 거부는 다양하고 활기찬 세상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다름에 대한 거부는 일시적인 안정을 준다. 하지만 쇄국정책의 끝은 쇄락 혹은 멸망이다. 다름이 주는 불안과 공포는 이해로 극복해야 한다. 문명사회는 이해력이 높다.

일본 J리그의 우라와 레즈 팀은 팬이 내걸은 ‘Japanese Only’라는 현수막을 방치했다가 무관중 경기라는 제재를 받았다. 다름에 대한 거부가 강해진다는 것은 사회가 위축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도 일본축구협회가 빠른 제재로 대처한 것을 보니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최근 우리나라 국립국어원은 사랑의 정의 ‘두 사람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에서 ‘두 사람’을 ‘남녀’로 바꿨다. 이제 부자간이나 모녀간에 사랑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되나보다. 스승, 제자 간에도 사랑이 오가기 힘들어졌다. 그런 모든 문제를 감수하더라도 동성애자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나 보다. 국립국어원이 감봉이나 감원이라도 했을까?

그런데 법무부는 왜 위축되었는지 모르겠다. 검찰이 이런저런 이유로 위축되다보니 검찰 관리 부처라서 함께 위축이 된 것일까? 한국 이름이 민수인 티베트 난민 라마 다와 파상씨는 16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한국 여성과 결혼해서 세 자녀와 한국인 장모님까지 모시고 산다. 귀화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그런데 법무부는 단 하나, 애매하기 이를 데 없는 ‘품행이 단정할 것’이라는 조항으로 귀화를 불허했다. 가족의 생계수단인 식당의 강제 철거에 저항하다 벌금을 물은 적이 있다는 것이 이유다. 티베트와 한국 간 인종의 차이를 극복하려면 한국인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을 가져야 하는 걸까?

민수씨는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한다. 나마스테는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누구나 안에 ‘아트만(atman, 절대 변치 않는 가장 내밀하고 초월적인 자아, 산스크리스트어)’을 가지고 있다. 그 같음은 나머지 다름을 갈음할 만한 같음이다. 아트만을 존중하는 민수씨는 ‘나마스테 민수’라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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