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이 중세의 마녀 사냥이다. 억울한 사람을 보호해야 할 성직자들이 오히려 마녀 사냥을 부추겼다. 그 잔인한 살육을 토대로 교회의 권위를 키웠다. 그 권위는 부패를 덮는 데 사용됐다. 아마도 그 당시의 성직자들의 상당수가 아직도 가장 처참한 지옥에서 징벌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마녀 사냥이 없었을까? 성직자들이 적극적으로 마녀 사냥을 막았다면 덜했을까?
인간은 홍수, 가뭄, 페스트 같은 재앙과 맞닥뜨리며 살아왔다. 재앙에 대처할 방법이 없을 때 인간은 심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서 종교를 만들었다. 간절한 기도로 신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은, 상황에 대한 간접 통제는 가능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가 재앙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악을 설정한다. 악의 힘을 눌러야 재앙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것이 마녀 사냥의 토대다. 위의 질문에 답해보자. 기독교가 없었다면 다른 종교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성직자들이 마녀 사냥에 앞장서지 않았다면 중세를 지배한 종교가 바뀌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서 겉으로는 바뀌었다. 자연 재해는 과학과 기술로, 사회적 재앙은 사회 구조로 해결해야 한다고 모두 말은 한다. 하지만 과학도, 기술도, 구조도 이해가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들은 때릴 수도, 욕을 할 수도 없다. 재앙이 불러온 분노를 풀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직도 대중은 책임질 ‘사람’을 원한다. 이성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오래된 본능은 아직 마녀를 원한다. 여기서 성숙한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가 갈라진다. 사회를 이끄는 집단이 구조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회는 발전하고 마녀를 만들어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사회는 퇴보한다.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나자 정부라는 정치권력과, 언론이라는 문화권력은 선장과 승무원을 대중에게 바치는 마녀로 선택했다. 그런데 선장은 늙은 비정규직이었다. 안전 운항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할 권리조차 없는 허수아비 선장에 가까웠다. 마녀로는 자격 미달이다. 그 다음 선택한 것이 유병언 회장이었다. 이단으로 의심받는 종교집단을 이끌고 있는 엄청난 부자. 마녀로 선택하기에 딱 좋은 인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배가 가라앉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배가 아직 떠 있으니 곧 구조되리라는 믿음이 서서히 깨져나가는 과정을 겪었다. 우리 사회의 무능과 허술한 구조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래서는 마녀사냥이 대중의 호응을 얻기 힘들다. 물론 유병언 회장은 억울한 마녀는 아니다. 참사의 상당 부분의 책임이 있다. 하지만 모든 대중이 안다. 구조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에 있지, 유회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부는 어떻게든 유 회장에게 관심을 돌리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 유 회장이 갑자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뇨병에 걸린 늙은이가 산속에 혼자 버려져 객사를 했다. 뼈가 보일 정도로 썩을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이래서는 끝판 대마왕 캐릭터로 쓰기가 곤란하다. 권력은 갑자기 패닉에 빠졌다. 그래도 여전히 검경은 구원파를 뒤지고, 종편은 유병언 특집을 내보내고 있다. 내세울 마녀가 없어지는 순간, 자신들이 마녀가 될 수 있음을 겁내기 때문이다..
가장 처절한 상처를 입은 유가족들이 오히려 가장 이성적이다. 그들은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을 원하고 있다. 국민이 오히려 정부보다 현명하다. 우리나라 국민이 만만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피로 얼룩진 근현대사를 거치며 마녀사냥을 지겹도록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대중이 정부와 언론에게 하는 말은 한 마디다.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마녀 사냥 맞다. 그리고 희생양만들기에 골돌한 어느 집단이 있다. 언론은 춤을 추고…이제사 언론이 정신이 든걸까? 한국은 언론이라 부를 그 무엇도 없다 다 기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