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사악한 건 사람이 아니라, 구조다”
세상에는 경계가 애매한 것이 많다. 명분과 핑계도 그 중의 하나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말하면 핑계다. 하지만 그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면 어떨까? 나는 거짓이 아니지만 상대는 말도 안 된다고 느낀다. 그럴 때 내가 보기에는 명분이고, 상대가 보기에는 핑계인 경우가 생기게 된다. 강한 사람이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하지 않아 약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 그 피해가 심각해서 주변의 약한 사람들까지 자극을 했다. 그들끼리 뭉쳐 강한 사람을 공격한다.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최선일까?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마치 무언가 할 듯 말 듯하면서 애간장을 태우며 시간을 끌면 된다. 피해자는 거듭되는 배반감에 점점 날카로워지고, 피해자를 도와주는 사람은 서서히 지치게 된다. 결국은 피해자가 주변 사람에게 거친 행동을 하게 되고, 약한 사람들의 연대는 깨지게 된다. 그 때쯤 되면 강한 사람의 뜻대로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사악한 방법이라고? 그렇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방법이다. 실제로 이런 사악한 방법을 쓰는 사람도 있다. 전문적인 사기꾼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한 탕을 하면 잠적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계속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사악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자주 일어난다. 사악하지 않는 사람도 사악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명분이요, 핑계다. 어떤 일이 우연히 자신에게 이롭게 처리가 되면 사람들은 다음에도 그 방법을 다시 쓰기 마련이다. 왜 그런 흐름이 생겼는지 모르는 경우에도 그렇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하면 일이 풀리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라고 말하기에는 창피하다. 그래서 명분을 만든다. 그리고는 믿는다. 따져서 믿음을 만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 만드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정부가 국민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고 마냥 시간을 끈다. 약자의 연대에 균열이 생긴다. 결국은 여론이 돌아서게 된다. 그때쯤 정부는 자신들이 믿는 명분을 말한다. “원칙을 지켰더니 국민들이 이해를 했다”라고. 사악해서? 아니다. 나름 나라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단지 스스로 만들어낸 명분을 진짜 믿을 뿐이다.
그들은 모른다. 이면에서 어떤 사악한 흐름이 생기는지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르려고 노력을 한다. “그 행동은 부도덕해!”라는 외침에 귀를 막지 않는 것은 인격적 훈련의 결과이지, 직위가 높아진다고 당연히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족들이 대리기사를 폭행한 사건을 예로 들자. 거듭되는 배반감에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상태다. 대리기사를 국정원 요원으로 의심할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대리기사 입장에서는 고소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그들이다.
그런 입장에서 ‘자식 잃은 것이 벼슬이냐?’라는 생각을 했다 한들 대리기사를 나무랄 수는 없다. 정부는 성공했다. 정부 담당자가 하고 싶었지만 너무 사악해 차마 할 수 없던 말을 다른 약자의 입장을 통해 전달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성공이었을까?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사악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악한 명분이, 사악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이 상황 위에 군림할 때 모든 사악함은 장마철 만난 곰팡이처럼 퍼져 나가기 마련이다. 명분이라는 방향제로 막기에는 곰팡내가 너무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