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혼네(속마음)와 다데마에(겉표현)
[아시아엔=김명근 한의사, <이기적 논어읽기> 저자] 의료인이 건강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금욕적인 삶을 강요하는 것은 곤란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건강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산다면, 돈을 금고에 쌓아놓고 하루 세끼를 라면으로 때우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의료인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학원의 선생님들은 대학입시 하나가 인생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고, 금융 계통의 종사자는 금융투자 계획이 인생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자기 세계에 갇혀 살다 보면 그 바닥의 기준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이컨이 ‘동굴의 우상’을 이야기한 것은, 사람들이 그 함정에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빠지고, 또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만만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편견은 조금만 노력하면, 조금만 교류의 폭을 넓히면 그나마 벗어날 만하다. 하지만 편견을 공유하는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 점점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국가 하나가 통째로 편견의 함정에 빠져있을 때는 상황이 고약해진다. 편견이 강한 사람이 그 나라 안에서는 오히려 모범적이고, 보편적인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표준을 도덕적이고 보편적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이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것이 그런 이유다.
일본인은 혼네(本音, 속 마음)과 다테마에(建前, 겉 표현)을 구분하는 것에 익숙하다. 본심을 안에 숨기고, 겉으로는 다른 말을 한다. 다만 이 겉으로 하는 말로 본마음을 눈치챌 수 있게 암시하는 어법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어법을 상대를 배려하는 어법이요, 전체의 조화를 중시하는 어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너의 혼네가 이것이잖아”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거나, 겉으로 내세운 다테마에를 대상으로 논리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미숙하고 유치한 행동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런 어법이 과연 배려에서 나온 것일까?
필자는 한 나라의 국민에게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성은 대부분 역사의 산물이라고 본다. 일본은 15~16세기 150년(센고쿠 시대, 이츠지모모야마 시대) 가까운 긴 내전을 겪는다. 내전 중 명분은 다테마에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번(藩)의 독립을 지키려는 지방세력과 직할령을 늘리려는 도쿠가와 막부 사이의 예리한 신경전이 오랜 기간 이어졌다. 말 한마디가 가문과 국가의 존속과 멸망을 가름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다테마에 뒤에 숨겨진 혼네를 읽고 대응하되, 나 역시 적당히 돌려서 다테마에로 응대하는 방식은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닐까? 또 지배계층이 혼네와 다테마에를 구분하는 언어 방식을 사용하다 보니, 일반 민중도 점차 이를 모방하기 시작한 것, 그것이 현재 일본 어법의 출발점이 아닐까? 필자의 추측이 맞다면 배려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만든 슬픈 유산. 그것이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어법이다.
한국과 일본은 최근 강제징용자에 대한 보상 문제를 두고 강한 갈등을 보이고 있다. 그 갈등은 경제와 군사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갈등 내용의 옳고 그름이나, 적절한 해법에 대해서는 필자의 전공이 아니니 접어두기로 하자. 다만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그 갈등 상황에서 서로 오가는 말들에 주목되는 바가 있다. 일본 관료들은 한국의 대응에 대하여 “미숙하다”라는 표현을 한다. 외교적으로 쉽게 쓰는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도 다수의 관료가 비슷한 표현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혼네와 다테마에에 익숙한 그들의 무의식이 본능적으로 판단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주요 산업 물자에 대한 수출을 어렵게 한 것은 누가 보아도 뻔한 보복 조치였다. 하지만 사법부 결정에 대해 행정부가 이를 뒤바꾸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엉뚱한 핑계를 대었다. ‘전략물자 관리 미흡’ 이것이 일본이 내세운 다테마에였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이 바라는 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보복인 것이 너무 뻔한 데 무슨 딴 소리냐?”, “한국의 반도체 산업의 발달이 두려운 것이냐?”라며 상대의 혼네를 까발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또 “전략물자 관리는 일본이 훨씬 더 허술하지 않느냐”라며 다테마에에 대한 논리적 논쟁을 걸어왔다. 앞에서 말했듯이 혼네를 직설적으로 지적하거나, 다테마에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일본인의 무의식에서는 바로 ‘예의 없음’이라는 빨간불을 켜게 만든다.
문제는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어법은 일본만의 예법이라는 것이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본 예의는 절대 아니다. 이를 상대에 대한 판단기준으로 삼았다면 ‘동굴의 우상’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 소아병적 태도일 뿐이다. 일본 방식에만 익숙한 일반 관료가 그리 느끼는 것은 그래도 눈 감아줄만 하다. 그런데 외교의 총책임자가, 누구보다 인류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야 할 사람이 일반 관료보다도 더 심한 표현을 하고 있다면, 이건 정말 우려되는 일이다.
물질문명에서 선진국의 앞줄에 섰다고 주장하는 일본이라면,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이제는 19세기 방식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