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근 칼럼] ‘선입견’이란 함정에 빠진 우리의 뇌
목표에 집착하는 정보기관장, ‘창으로 날아가는 나비’와 같아
유리로 된 건물에 날아든 나비는 무조건 창 쪽으로 날아간다. 보통 밝은 곳은 열린 곳이다. 어두운 곳은 막힌 곳이다. 나비는 본능적으로 그걸 안다. 그래서 가장 밝은 곳으로 날아간다. 유리면을 따라 열심히 출구를 찾는다. 절대 문 쪽으로는 날지 않는다. 결국은 지쳐 죽어간다. 나비의 본능이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이성이 있는 인간은 좀 다를까? 인간의 이성은 그렇게 정교한 것이 아니다. 이성은 원래 본능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하나의 욕구만이 느껴질 때는 인간은 그것을 바로 한다. 이성은 그 욕구가 채워지기 쉽도록 방법을 찾는 일을 할 뿐이다. 이성은 두 개 이상의 욕구가 충돌할 때 비로소 바빠진다. 예를 들어보자. 신상품을 사고 싶은 욕망을 이성이 억제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신상품에 대한 소유욕과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안전의 욕구가 서로 싸우고 있을 뿐이다. 이성은 이를 중재하고 있는 것이다. 숙련되지 않은 이성은 올바른 결론으로 잘 가지 못한다. 하나의 욕구에 핑계거리를 대주거나 서로 싸우는 두 개의 욕망 중 더 강한 욕망이 승리할 토대를 만들어주는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욕구 중 일관성에 관한 욕구가 있다. 누구나 일관성이 없는 사람을 싫어한다. 일관성이 없는 사람은 예측이 안 되고,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은 집단에서 따돌림 당하면 바로 생명을 위협받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주장하던 논리를 바꿔야 할 때 큰 괴로움을 겪는다.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느낌을 굳이 외면하며 그냥 갈 것인지, 아니면 태도를 바꿔 일관성을 잃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할 자료를 찾는 쪽을 택한다. 모든 자료를 객관적으로 다시 검토하고 바꾸는 쪽을 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한 번 형성된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이런 식으로 잘못 형성되어 바른 판단을 계속 방해하는, 본능도 이성도 아닌 어중간한 놈을 우리는 선입견이라고 부른다. 이성을 주체적 위치에서 욕망의 종으로 타락시키는 것이 선입견이다.
남북화해를 추구하던 정권은 좌파 정권이었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될까? 모든 기록이 그런 관점에서 보인다. 남북이 함께 이롭게 하자는 제안을 봐도 공평하게 보지를 못한다. 남쪽에게 이로운 점은 축소돼 보이고, 북쪽에 이로운 점은 확대돼 보이기 마련이다. 밝은 쪽이 무조건 출구라고 판단하는 나비와 마찬가지다. 북한에 유화적인 표현이 단 한 마디라도 섞인다면 국익을 포기하는 태도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망상에 빠진 오셀로에게는 데스데모나의 사소한 모든 행동이 뚜렷한 불륜의 증거로 보였다. 북한의 붕괴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우리의 국익에 도움되는 내용조차 북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를 감추기 위해 덧붙인 치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정보 활용의 기본은 ‘판단은 나중에’로 요약할 수 있다. 정보를 먼저 수집하고, 분석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목표를 정한다는 합리적 이성, 이것이 정보를 다루는 태도의 기본이다. 목표를 먼저 설정하고 정보를 모으는 사람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는 없다. 목표가 먼저 설정되면 시각은 왜곡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정보기관장이 특정 목표를 고집하는 나라는 창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의 꼴이 되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