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오지 산속에 숨은 나만의 설국

여기저기 왔다 사라지는 순백단청에 탄복

오지산속으로 접어들었다. 온 세상이 눈꽃으로 장원(莊園)하다. 아이젠의 뽀드득 소리와 새들의 재깔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눈송이가 소담스레 내려앉는다. 눈에 파묻혀 온통 휘황찬란한 상고대가 새하얗다. 구석진 산골에 터진 홈런··· 눈 세상, 대박이 터졌다.

설국(雪國)이 한살을 보태주었다. 짐짓 숨겨진 몽한(夢閑)한 세상에 있다. 저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태어난 자리에서 인간문명보다 더 찬란하게, 숲이 사는 방식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자연의 일을 뭐라고 조잘대봐야 천지운행은 그대로일 것이다.

숲에 들어 독백한다. 자연은 불필요한 것을 완전 제거한 비선형 스펙이다. 눈 페스티벌! 여기저기 왔다 사라지는 순백단청(丹靑)에 탄복하며 ‘나’라는 주어를 버리기로 했다.

봄 햇볕이 들면 저 아름다운 ‘설국(雪國)’은 스러져, 눈물은 계곡으로, 강으로, 바다로, 안개로 알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종적을 감출 것이다. 하지만 죽지 않고 떠다니며 만물에 생명을 주는 H2O! 그들은 양성자분자(陽性子分子)를 온 누리에 뿜어 대지만 우리의 눈에는 하잘 것 없는 흰색으로만 보인다.

물은 꿈과 도원경(桃源境)의 조상인 눈, 안개, 구름, 비인데 이를 몰라보는 인간을 향하여 통곡할 것이다. 날이 풀리고 여름이 되면 온 하늘을 향해 잎을 나풀대며 태양아, 바람아, 하며, 비 내리는 날 ‘싸이 춤’ 흔들어 대는 푸름 밑에서 조촐한 노숙이 그립다.

도시는 이제 위태로워 보인다. 저편에서 오가는 여백 바람을 타고 시린 가슴 온데 간데없다. 조화무궁(造化無窮)한 숲에 팔려,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번개처럼 폭풍우처럼 잘도 살아왔다. 늘 무엇인가에 팔리다보니, 그저 맥없이 닥쳐올 마지막 그날도 피해갈 수 있는 양 그렇다는 얘기다.

겨울, 소멸과 끝의 시간만은 아냐

이 산골은 영하 20도의 한천(寒天)이다. 칼바람에 맞서 하늘을 몰아 쉬어 하얀 입김으로 가슴을 턴다. 여위어가는 움막캠프 난로에 장작을 지피며, 살아있음을 고맙고 고맙게 여기며, 뜨거운 방 아랫목에 누워 눈 속에 뒹구는 호사를 상상한다.

이해가 끝나는 혹한의 모색(暮色)속에 홀연히 나와 마주한 석양··· 장려한 서쪽 연봉의 낙조를 휘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울은 이제 그냥 쓸쓸한 퇴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한 사나흘 동안 흐벅지게 눈이 내려서 움막캠프 추녀까지 깊이 묻혔다. 이제서야 이 겨울과 고요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겨울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겨울은 매양 소멸과 끝의 시간만은 아니다. 눈 덮인 산속의 모든 생명이 휴식과 절제의 시련을 통해 생성의 시간을 기다리는 자연성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존 패러다임이다.

눈에 갇힌 나는 샹젤리제(Champs-Elysees) 왕국의 성주라는 생각에 혼자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실제로 나는 밋밋한 삶을 못 견뎌하고, 부족한 호기(豪氣)를 채우기 위해 엉뚱 맞게도 한평생을 산속을 싸다니며, 나만의 ‘자유와 홀로서기 왕국’을 만들어 왔다. 내가 일구어온 50년 동안의 ‘주말레저 농원’이란 것을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오지 산속에 숨은 나만의 ‘소국(小國)’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낙원’이자 ‘피난처’이기도 하다.

이렇게 광야에 벼려진 낮은 자로 살고 있지만, 내 깐에는 이렇게 사는 것이 세계를 향한 ‘도전과 모험의 격(格)’이라 여기는 착각을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나의 생애와 감성과 문화의 높은 밀도에 가닿는 모든 것을 걸고, 사유와 행위를 묶어 생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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