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강원도 정선 골짝 귀촌청년의 행복②
<귀촌청년의 행복①에 이어>
캠핑 준비를 한창 하고 있는데 앞마당 나무숲에서 산새 한 마리가 조용히 짓기 시작했다.
새 소리는 부드럽고 낭랑했다. 주인 없는 집에 와서 왜 소란을 피우는가. 경고 메시지 같기도 하고···. 산이 깊어 낯선 새를 쉽게 만나게 된 것도 같고, 산새는 외로운 오막집 한 채의 꿈 노래를 나에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마음에 간직했던 곳, 주인 없는 농막의 뜰 한 귀퉁이를 점령하고 감당하기 벅찬 끽고(喫苦)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자리에 없는 타자들과 시공을 넘어 소통을 한다. ‘제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我 from-self or ego)으로서의 자유, 생명과 무위, 허무 등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를 사유한다. 내 자신과의 불화를 감내하며, 나를 초월치 못함을 절망하며, 천방지축의 자신을 자괴한다.
겹겹이 산에 둘러 싸인 늦은 봄의 잔광(殘光) 속에서 짙어가는 녹음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갓 태어난 연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대안(對岸)의 낯선 풍경이다. 이런 축복된 장면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해는 저 멀리 일찌감치 져가고 노추(老醜)는 다만 사무친다. 내가 홀로 바람처럼 떠도는 객인(客人)이 아니었다면 산과 들녘, 강과 저 하늘의 달과 별을, 그리고 들풀과 꽃을 자연의 친구들로 마음을 다해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물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을 때 화두는 더욱 ‘화두’ 답다. 홀로 사색하니 흔적이 안 보인다.
사색의 주인이 안 바뀌니 그게 그거다. 무아(無我)라야 사색이 되는가 보다.
상념이 사라지면 여백이 생기고 평화롭다. 늘 겪는 일이지만 땀을 흘려 노동을 해서 육신의 고통이 생겼을 때 상념이 없어진다. 몸이 편해지면 대체로 마음이 혼잡하고 고통스럽다. 반대로 몸을 혹사하면 대신 마음이 이완된다.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서 캠핑준비를 하는데도 이만 저만한 일거리가 생기는 게 아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지쳐도 더욱 즐겁다.
오래 전부터 산에 가고 밭을 일구다보니 그 청년은 이미 ‘산’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마음공부에 대해 묻지 못하고 물을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되는 그저 그의 행적만이 거울이다.
그는 생각에 멈추는 게 아니라 바로 행동할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라도 아주 작은 실천보다 못하다. 그 청년은 한 눈 팔지 않고 노동에 몰입하는 순진무구한 참된 사람이다. ‘노동 선’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노동은 굳이 농사나 공사판의 힘든 일로만 여길게 아니라 일상에서 하는 일들이 모두 노동이다. 야외 활동과 주말영농은 적지 않은 의식적 노동이 소모된다. 자기 안의 고뇌가 생길 때 이런 취향 노동을 하면 번뇌 망상이 고요히 사라지고 자기를 다스리는 길이 보인다.
쉽게 말해 이게 ‘노동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주말에 힘들게 농사일하고 산에 가고 야외 문화생활을 하는 이유이다. 물론 상념도 하나의 노동이다. 자연주의의 삶은 노동을 최우선으로 삼고, 간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발표한 이래 ‘작은 것’이 유행을 했고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오래된 미래’를 쓴 후에 개인의 내면성과 자연에 대해 새롭게 열광하며 ‘라다크’에 관심이 쏠렸다. ‘사물이 어떠해야 된다’라는 인위적 생각에 매달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것을 수용하는 자연관이 평온한 삶을 갖게 할 것이다.
인간이 어느 한 분야에서 스스로 땀 흘려 깊어지면, 그의 인생도 점점 원숙해지는 게 아닐까.?인간의 모태인 자연과 농사일, 그리고 야외 생활을 꾸준히 이어간다면 자신의 내면이 자연과 유랑하는 거주(去住)의 자유를 만난다.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이 버몬트 숲 속에서 100살 되도록 산 ‘조화로운 삶’도 바로 이런 자연에 사는 이야기이다.
정말 그렇다. 진짜 그렇다. 우리는 소박하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이고, 주위와 사회와 지구를 생각해서이다. 새 옷, 새 차, 몸치장, 명품, 수다 떠는 모임들···.
물질적인 부를 위한 경쟁에서 의식적으로 빠져나와 스스로 만족하는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겠다. 검소한 생활과 생태계에 대한 사랑이 내면적 안정의 삶이다.
독거 청년은 바로 이 진리를 철저하게 실천해 맑은 가난을 만들어 사는 나의 ‘멘토’이다. 그는 나의 자식보다 나이가 아래이지만 나는 그를 마음의 선생님으로 여기고 섬긴다. 그와 내가 사는 방식은 많이 다르지만 잠재의식으로 통하는 구석이 있어 문득문득 그를 못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가 틀에 밖인 행렬에서 일탈(逸脫)하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