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산에 오르는 피아노 선생님
‘Amanda’는 어린 눈망울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상처도, 열정도, 사랑도, 생각도, 피아노 자리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하는 작은 교실의 하모니···. 그의 그지없는 시간입니다. 그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살갗으로, 파란 꿈으로 어린이 같습니다. 젊음 떠난 건반 앞에서, ‘마음 빈곳’ 채워줄 여운 그리워, 유려(流麗)했던 추억 홀로 합니다.
앙증맞은 원생들과 눈으로, 귓가로, 감각으로 부대끼며 음악을 넘어 웃음소리 꽃피는 작은 소망을 이루어 나갑니다. 음악과 아이들에 파묻혀 어느덧 인생은 가고, 세월은 흘러 그 흔적이 먼발치서···. 이 즐거움 ‘언제까지일까?’ 묻습니다.
떠나려 해도 쉽지 않은 그 수많은 고뇌(苦惱)의 시간···. 잊을 수 없는 정든 아이들, 길고긴 세월동안 같이했던 사연들. 아픔, 슬픔, 그리움이 뼈 속까지 스밉니다.
차라리 눈을 감자. 하지만 소용없는 일. 그는 소녀 시절의 천진(天眞)한 꿈을 아직도 못 버리는 고집쟁이입니다.
아! 피아노여, 울림이여, 멜로디여···. ‘젊음’을 활활 불태운 20여 년 음악의 인생. ‘Amanda’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산’. 온실 같은 음악에 갇혀 살던, 그에게 그도 모르게 자라나는 무엇인가 재촉하는 운명은 ‘자연’이었던가 봅니다.
그는 첫 등산에서 평생을 살아낸 하루 같은 신선한 충격과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산이라곤 남산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식물원 꽃처럼 자라온 그가, 길 없는 험준한 산에 죽기 살기로 마구 끌려 다녔습니다.
그래서인가 그는 바로 ‘산에 가는 사람’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가 ‘산’ 없이는 못 살게 된 지 10년째입니다. 생각나면 산에 가는 게 아니라, 아예 매주 산에 가는 맹렬 분자입니다. 1년에 50회는 산이나 들, 숲, 바다, 농원에 있습니다.
아웃도어의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삶은 인간의 문제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 지요. 그의 몸에는 아마도 집시의 피, 몇 방울이 섞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삶의 모습을 빨리 이해하고 바로 변신했습니다. 초월을 꿈꾸는 그는 고통과 맞서 유쾌한 깨달음을 야생에서 배웠습니다. 그는 자연에 살아야 하는 목표가 분명하고, 스펙이 뛰어난 용기 넘치는 ‘자유인’ 입니다. 스스로 빛을 내지 않으면서, 어둠과 다를 바 없는 세파를 안으로 잠재우며 견뎌냅니다.
당신도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Amanda’ 처럼, 삶에 대한 진정성을 자연에 맡기고, 맑게 처신하는 자각(自覺)된 자유인을 만날 때, 나는 신선한 위안을 받습니다. 그는 생계만 해결된다면 혼자서 자유롭게 지구를 떠다니는 ‘보헤미안’이 유일한 꿈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인생의 주름살이 아름답게 빛나는 곳이 야성의 자연이란 것을 철학으로 알게 된 그는, 그리하여 모양새, 꾸밈, ‘스타일리스트’를 자연에 맡겨 당당합니다.
한겨울에 드니 ‘북극곰 캠핑’의 진수가 알알이 떠오릅니다. ‘생각만 해도 마냥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영하 18도의 눈 덮인 진부령 용대리에서, 강풍의 영하 15도의 대관령 양떼 목장에서, 폭풍이 몰아쳐 텐트가 날아가는 영하 12도의 소백산에서, 가을 단풍 한창인 덕유산 오토캠핑장에서, 청포대 해변에서, 이외에도 수많은 오토캠핑장을 매월 한번 이상 전전하며, 야지에 몸을 던졌습니다.
고생하며 머물렀던 자리는 흔적이 남기 마련인가 봅니다. 모닥불 둘러 앉아 마주한 사람들과 무엇인가 지껄이며 매캐한 연기 속에 커피 한잔···. 시상(詩想)에 잠겼던 그때 그 사람들 스쳐갑니다.
모닥불 가물가물 마지막 한 점, 숨 거두자 칠야(漆夜) 같은 어둠 위로 총총이 박힌 별들 쏟아집니다. 밤 깊은 산에 계곡이 산을 부르는 소리, 우리의 생각을 빛나게 뽑아 올리는 내적 울림의 소리!! 긴 밤을 지새 시간이 끊길 듯 이어질 듯, 가슴 뛰고 피를 끓게 하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 우리는 늘 위험한 일을 만들어서 즐기는, 삶이란 모두 실험이 아닌가.
5년 전 11월 일본 북해도에서 큐슈까지 장장 2500km를 오토캠핑으로 일본열도를 완전이 횡단했습니다. 우리는 ‘시드는 꽃의 운명’을 알기에 소박한 삶을 모토로, 길 위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빈곤하다 못해 처량한 처지를 감내하는 끼 많은 ‘작당’을 자처했습니다.
우동 한 그릇 제대로 안 사먹은 우리들. ‘Amanda’는 그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슴 요동치는 자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