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잊혀진 화전민을 찾아서②

비수구미 골짜기 모습 <사진=화천군청>


1962년 북배산 등산길 중 만난 화전민

1960년대 이전 우리나라 등산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설악산 북한산 등 유명하다는 몇몇 산을 빼고 등산길이라고는 전혀 없던 시대이다. 모든 국민이 배를 굶주리는 판국에 산에 오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사치이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니 이름 없는 오지의 산만 골라 타는 나 같은 사람은 ‘지도와 축척 자와 나침반’을 갖고 다니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는 독도법과 측량의 도사가 돼야만 했다.

50년 전인 1962년 9월, 추석을 앞둔 어느 날. 가평과 춘천의 경계선에 있는 북배산(866m)을 목표로 등산길에 올랐다. 춘천 태생인 나는 어릴 때부터 겨울이 되면 제일 먼저 눈을 뒤집어쓰는 그 높은 산을 신비롭게 여겼고, 어른이 되면 언젠가는 꼭 올라가서 내 고장을 거꾸로 내려다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북배산 등정은 춘천의 삼악산 동북쪽에 있는 덕두원리에서 출발하여 명월골을 지나 고도트미~독가동~싸리재를 거쳐 긴 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향하는 코스다. 왕복 20km의 길 없는 원시의 숲을 지도와 나침반을 갖고 찾아 올라가야 하는 만만치 않은 산행이다.

등산 초입인 덕두원리는 초가집이 몇 채 있는 빈한한 벽촌이다. 그곳에 사는 농부에게 지도를 펴들고 산촌에 대한 몇 가지를 물었다. 멀리 하늘과 맞닿은 능선을 싸리재라고 하며 싸리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싸리버섯이 많이 나고, 봄에는 고사리와 고비가 많이 자생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후 수년을 두고 봄이 되면 싸리재에 올라 고사리와 취나물을 뜯고, 가을이 되면 싸리버섯을 채취했다. 초가을에 싸리꽃과 칡꽃의 은은한 향기를 만나면 저절로 슬며시 눈이 감기는?감성을 못 잊어 작심하고 올라 다녔다. 도라지꽃과 더덕꽃도 지천이었다.

농부는 나에게 이 산골에 무엇 때문에 왔느냐며, 적이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때는 등산이라는 말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쉽게 설명할 길이 없어 그냥 얼버무려야 했다. 당시에는 시골에 가면, 간혹 산골사람을 차에 태워줘야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차를 타본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엉겁결에 신을 차밖에 벗어놓고 차에 올라타는 해프닝이 벌어지는 그런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국민소득이 80$ 정도였으니까?개화기시대와도 다를 바가 별로 없었고, 지금의 아프리카 수준을 상상하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화전민 움막집터 1973년부터 강제 철거··· 1976년 이후 보기 힘들어

덕두원리를 출발해 거의 3시간을 걸어 6km 지점에 이르렀는데, 어디선가 도끼질 소리가 들려왔다. 지도를 펴놓고 현 위치를 확인해보니 싸리재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이다. 도끼소리는 진작 멈추었기 때문에 처음 소리가 났던 쪽으로 더듬어가며 찾아보기로 하였다. 숲을 헤치고 너럭바위를 넘어 계곡을 가로질러 간신히 인기척이 났던 곳을 찾아가보니 산비탈 으슥한 곳에 화전민이 살고 있었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억새지붕 한쪽은 삭아서 내려앉았고 벽은 싸리로 엮어 진흙을 바른 움막이다. 이 집이 바로 화전민 움막집터였다. 1973년 강제 철거됐다.

1968년 10월 삼척공비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소년 ‘이승복’이 희생된 반공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깊은 산속에 산재해 있던 온 나라의 화전민들은 1968년 화전민 정리법에 의해 1976년까지?강제 하산됐고, 농촌에 만든 ‘독가촌’으로 집단이주했다. 그 당시 전국 산골에 산재해 있는 화전민은 무려 4만호에 이른다.

8년간의 강제 이주 작업이 끝나고 1976년 이후에는 화전민을 산골에서 볼 수가 없게 됐다.

남이 안 가는 산간벽지를 다니다보니, 산골 외딴섬에서 가끔 화전민을 만나게 된다. 자연 무구한 순수한 사람을 만나는 행운의 날이다. 그 만남은 인간 고통의 뿌리와 우리 역사가 지닌 고난의 흔적을 현지에서 몸으로 배우는 찡한 만남이다. 왠지 생의 회의가 강렬하게 복받치며,?삶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나의 갈 길은 뚜렷해졌다. 그들이 나 모르게 나에게 희망을 준 까닭이다.

나도 ‘화전민’이다. 나는 ‘장발장’이다. 소박하게 살자! 자연에 살자! 은혜와 자비에 살자! 바로 이거야! 속으로 외쳤다.

그때 새파랗게 젊은 마흔이었고, 그 충격으로 ‘아나키’적인 ‘도시의 화전민’을 자처하며 ‘1인 국가’를 창건한다. 화전민을 연민한 것은 나의 결핍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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