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화전민의 딸’, 머슴에게 시집보내던 날

두메산골의 삶이란 


잊혀진 화전민을 찾아서④

고기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고 추석이나 설 때가 되면 돼지고기 두서너 근을 제사상에 올린 후에 얻어먹는 게 고작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해에는 눈에 빠진 토끼나 노루를 사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몇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드문 횡재이다.

딸을 시집보내는 날까지 딸에게 먹이는 고기는 한평생 한 근을 넘지 못한다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지어 뇌까리며 침을 획 내뱉는다.

‘육실할 년아! 칵 뒈져버려라’ 하며 시도 때도 없이 딸에게 욕바가지를 퍼붓고 살아왔는데, 그 딸이 오늘 시집을 간다.

어미는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통곡한다.

못 먹이고 천덕꾸러기로 자라온 죄 없는 자식에게, 가난한 분풀이를 매질로 해댔던 잘못의 한이 복받쳐 몸부림친다.

결혼이라야 예식도 없고 하객도 없이 단둘이 보따리 하나 달랑 들여보내는 게 다다. 막상 딸을 떠나 보내야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해준 게 없고, 한입이라도 덜려고 남의 집 식모로 팔려가 눈칫밥 먹인 게 측은하고 불쌍해 어미가 죽어 마땅했다.

딸은 말라빠진 몸매와 휑한 눈에서 주르르, 납작한 오징어 가슴에 눈물이 얼룩진다.

남의 집 식모로 뼈 빠지게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라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돌아왔는데 생판 보도 듣도 못한 머슴살이를 데려와서 봇짐 하나 들고 따라 가라고하는 꼴사나운 날이 됐다.

자나 깨나 부모의 고생을 덜어 드려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 딴 생각은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는 터였다.

식모살이 집에서 얻은 귀하고 귀한 구리무(크림)를 엄마에게 발라드리려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딸은 하염없이 흐느낀다.

엄마는 흐느끼면서도, 세끼 굶어도 신랑을 챙겨라, 그게 살 길이다.…너는 뼈만 추려도 좋으니 시집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이것아! 이제 어미는 잊고 잘 살아야한다. 아이고 아이고, 한다.

지지리도 가난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나 배를 골리며 겨우겨우 살아왔다. 욕지거리를 먹는 것도 매를 맞는 것도 산과 엉킨 사람의 도리로 여겨왔다. 하기야 남과 섞여 살아본 적이 없으니 움막과 산과 애비 어미가 다였다. 그런데 하늘같이 여겨왔던 불쌍한 아버지 어머니와 헤어져야 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엄마는 보자기를 폈다. 그 보자기는 엄마가 다시는 이 소굴에 안 기어들어 온다고 봇짐을 챙겨 도망치던 낡아빠진 보자기다. 가끔 도망쳐 나가서도 날이 어두워지면 언제 그랬더냐하는 모습으로 감자를 솥에 안치곤 했었다.

그 보자기가 대물림으로 오늘 이 집을 떠난다.

이 보자기는 오늘 허드레만 싸는 게 아니고, 이 집의 혼과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과 딸이 어렸던 시절 혼자 쓸쓸하게 공깃돌 놀이하던 꿈을 담아간다. 아버지는 꼬깃꼬깃 구겨진 얼마 안 되는 돈을 보자기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면서, 얘야! 이거 얼마 안 되는 거 이게 다다, 하며 획 돌아 주저 앉자 차돌같이 굳어져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낀다.

나중에 떠날 때 머슴은 보따리를 겨드랑에 끼고 저만치서 색시를 기다리는 눈치다. 딸은 마당의 장독대를 쓰다듬어보고 대추나무를 어루만지며 발이 안 떨어진다.

이 기가 막히는 광경이··· 화전민의 전부이다.

산길을 굽이굽이 휘어 내려가면서 구비마다 정든 바위와 나무를 보면서 울며 낯선 머슴을 따라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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